이번에는 동학사상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후천개벽'에 관해 이야기해보자.
후천개벽은 선천시대에 대한 또는 선천개벽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이것은 주역적 전통을 잇는 역학사에서 주로 논의되어 왔으나 동학사상에서는 1860년 동학 제1대 교주인 수운 최제우 선생의 득도(得道) 내지는 동학선포 또는 동학 포교 이후의 역사를 의미하며, 그 이전시대와 구별되는 문명사적 일대 전환을 뜻한다.
즉 한 시대적의 경륜에 그치는 차원이 아닌 수만 년에 걸친 인류문명사 전체의 기본질서를 바꾸는 거대한 우주적인 차원에서의 변혁을 뜻하는 말이다. 이러한 후천개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밥'이다. '밥'은 '제사와 식사' 두 방면에 모두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인류의 모든 역사에 있어서, 인류활동의 모든 방면에 있어서, 소위 가장 고상하고 그 격이 높고 신령한 활동형식은 한마디로 '제사'라고 할 수 있다. 제사는 하늘 또는 천상적인 것, 이른바 '이데아'의 영역과 관련이 있고 그것과 대척적인 차원에서 저급하고 고통스럽고 모든 동식물이나 대지나 흙과 관련 있는 인간 활동은 노동과 연결된 '식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이 '제사'와 '식사'가 이렇게 천상적인 것과 지상적인 것 또는 고상한 것과 천박한 것으로 이원적으로 분리·분열된 것이 아니라 '제사가 바로 식사고 식사가 바로 제사'라는 '밥 한 그릇'의 사상이 동학의 후천개벽사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까지 선천시대 동서고금의 인류문명사, 인류의 정신적 역사는 한마디로 말해서 벽 쪽으로 위패를 놓고, 메밥 역시 벽 쪽으로 놓고 제사를 모시는 상제가 그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향벽설위(向壁設位)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이 제사방식이 갖는 의미는 인간의 노동과 사회생활 전체, 인간의 희망과 꿈, 욕구 그리고 고통, 온갖 형태의 인간 감정과 이성적 활동, 우주와 자기와의 관계, 이웃사람과 자기와의 관계, 모든 타생명체와 자기와의 관계를 포함하는 일체의 것이 저 벽 쪽에 있다. 시간적으로는 미래에, 내일에 신이 있고, 천국이 있고, 약속의 땅이 있고, 행복된 낙원이 있다는 구조로 되어 있다. 신이 내 눈의 저 앞편에 있다는 생각은 그 신이 내일 약속의 땅을 나에게 주리라는 생각과 깊은 관계가 있다. 따라서 자기노동의 결과와 자기의 꿈과 모든 희망을 미래로, 저 벽 쪽으로 갖다놓고 그쪽으로 절하면서 오늘은 참고 견디며 희생한다. 오늘을 없이하는, 오늘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생활을 하도록 민중에게 요구해 온 것이 인류 고금동서의 역사 전체를 통해 설파된 모든 사상들의 총체적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 자본주의는 미래에 이루어질 물질적 성장발전과 함께 낙원이 오리라는 약속으로 온갖 형태의 공황과 위기를 넘겨왔다. 반면 사회주의는 스스로 구세주라 칭하며 생산력의 증대와 함께 실현될 공산주의 자유의 낙원을 약속함으로써 모든 노동자들을 초과노동으로 몰아넣었다.
모든 약속과 행복은 미래에 있으며 신과 질서와 가치는 미래에 있는 것으로 착각되어 왔다. 그러나 메밥과 위패를 살아있는 내 앞으로 돌려놓는 제사방법인 혜월선생의 향아설위(向我設位)의 사상을 통해서 볼 때 향벽설위는 허구일 뿐이다.
인간의 역사는 마치 과거라는 시점으로부터 미래라고 부르는 어떤 시점을 향하여 진행해 가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리고 우주의, 생명의 진행과정도 과거에서부터 미래로 화살방향으로, 직선적으로, 시간주의적으로 진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착시일 뿐이다.
진리는, 생명은 '지금, 여기' 전방(全方), 곧 모든 방향에 살아있으며 상하좌우, 동서남북, 시방(十方)전체에 생명의 움직임이 있고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역사는 다만 단순하게 시간적인 과거에서 시간적인 미래로 진행한다기보다 사방팔방, 시방으로, 시공 연속적으로 무한분산하면서 동시에 무궁무궁하게 질서를 형성하면서 복잡화하는 것이다. 그것이 차원을 변경하면서 끊임없이 반복확장, 확장반복하면서 창조적으로 순환하며 신령한 생명이 질적으로 확산되는 과정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제사 드리고 있는 상제, 즉 사람, 나, 우리 속에 살아 있는 신, 우리 속에 살아 있는 우주생명, 우리 속에 지금 여기서 마치 작은 씨앗처럼, 비록 낮은 차원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현실적으로 실현되어야 할 무궁한 우주생명, 이것에 대한 확신이다. 따라서 향아설위는 메밥의 위치를 벽에서부터 제사지내는 상제 앞으로 되돌려 놓음으로써 인류문명사 전체를 사상적으로 개벽시키는 일대 전환점을 만든 것이다.
더욱이 죽은 귀신의 시간인 밤이 아니라 산 한울님인 인간의 활동이 가장 왕성한 대낮 정오에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모든 종교와 사상의 '피안'을 '차안'으로 혁파한 것이며 살아 생동하는 산 사람, 산 민중의 생명종교를 창조했다고 할 수 있다.
아시다시피 제사는 가장 성스러운 것이다. 가장 성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제사지내는 사람의 가장 속된 노동과 분리해서 그 노동을 포섭하는 상부구조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향아설위에서는 가장 성스러운 신의 활동과 가장 속된 인간의 노동이 아무런 격차도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따라서 이것은 인류문명사의 구조를 전체적으로 변혁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생활에 있어서 모든 인간 노동의 결과를 자기 자신 속에 살아 있는 노동 주체인 한울님에게 되돌리는 것이며, 우주생명이 우주생명에게 되돌리는 순환을 실현하는 창조 행위, 확대재생산 행위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제사인 동시에 노동이며 사회정의 실현인 것이며, 사회정의의 실현인 동시에 문화적 자기실현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만약에 조상의 혼령이 자기 안에 살아 계신다면 우주 전체의 생명들도 자기 안에 살아 계시는 것이다.
밥 한 그릇을 자기 앞에 갖다 바치는 그 제사를 지낼 때에 자기 앞에 갖다 바치는 밥 한 그릇, 삼시 세 끼 먹는 밥 한 그릇 속에는 우주 전체의 삼라만상의 협동적인 노동이 들어 있다.
농사는 인간이 혼자 짓는 것이 아니다. 메뚜기와 지렁이, 거미의 도움이 필요하며 물과 흙과 바람과 태양의 작용이 있어야만 농사를 지을 수 있다. 또한 조수의 변동과 달의 변화에 따라서 농사는 이루어진다. 따라서 천지 삼라만상의 협동적인 움직임에 의해서 쌀 한 톨 밥 한 그릇이 만들어진다고 볼 수 있다.
이 밥을 우주의 온갖 생명이 자기 안에 계신 우주생명에게 갖다 바침으로써 우주 삼라만상의 공동의 노력을 통해 나타나는 천지의 생명운동을 자기에게 통합시키는 것이며, 순환을 통해서 다시금 노동력의 외화를 통해서 우주의 삼라만상과의 빛나는 생명체험으로서의 창조적인 생산노동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창조적 진화, 창조적 순환의 매일매일의 구체적인 성취인 것이다. 제사와 식사는 여기서 하나가 된다. 따라서 이것은 인간 안에 살아 있는 우주생명은 천지 삼라만상과 일치되어 있으며 자기 안에는 수천억 은하계까지 포함하는 전체 생태계, 전체 생명의 운동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뿐만 아니라 자기 안에 먼 조상, 가까운 조상, 십대와 백대조, 백대조 이전의 한울님 즉 요즘 말로 하면 우주 전체의 진화의 역사가 포유류, 파충류 단계, 식물과 바이러스와 무기물까지 포함하는 전체 진화의 역사가 자기 안에 현재에 살아 있다는 생각과 일치한다.
이것은 현대 뇌생물학, 무의식 연구에 의해 밝혀진 인간의 심층의식 안에 전(全)진화의 기억이 축적되어 있고 예감이 움직이며 인간 두뇌활동 안에 전우주 삼라만상의 생명활동이 다 그대로 일어난다는 보고와 일치한다.
조상이 내 안에 살아 있다는 이야기는 바로 이것과 일치한다. 그리고 자기 안에 조상이 살아 있다는 생각은 미래에 태어날 자손들의 혼백의 씨가, 생명의 씨가 이미 현재에 자기 안에 살아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따라서 지금 여기 살아 있는 인간, 제사지내는 사람, 식사하는 인간의 그 마음과 기운 안에는 처음도 없고 끝도 없는 생명의 전우주적인 역사가 살아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현실의 생활 속에서 실현되고 있다. 이것은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삼세실유(三世實有)의 사상과 그대로 일치할 뿐만 아니라 아인슈타인이나 민코프스키가 이야기하는 4차원 세계와도 그대로 일치한다.
따라서 향아설위 사상은 전문명사의 구조를 개벽할 뿐만 아니라 오늘날 긴급히 요청되고 있는 과학과 종교의 통일, 결합에 대해서 커다랗게 문을 열어 놓은 사상이라고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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