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침침하다. 혼자 길을 걷기도 무섭다. 행여나 쓰러질까 마음 놓고 다닐 수가 없다. 만성 간경화로 하루 종일 온기 없는 방 안에 누워 지내다시피 해야 한다. 아이 둘이 학교에 가고 나면 온종일 나 혼자다. 이럴 때 아내가 있으면 마음이라도 편하련만. 먼저 세상을 등진 야속한 사람이다.
외환위기가 오기 전만 해도 먹고 살 만했다. 아내와 나, 직원 1명과 더불어 조그만 섬유업체를 꾸렸다. 열심히 일했지만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한 순간이었다. 빌려준 돈을 떼이고 IMF사태가 터지면서 수년간 땀 흘려 가꿔온 공장 문을 닫아야 했다. 내게 남은 것이라곤 아내와 두 남매, 그리고 만성 간경화라는 병 뿐이었다.
아내는 생활고에 시달리다 지난해 7월 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쓰러진 나 대신 밤낮 없이 일하기를 4년. 힘에 부쳤을 터이다. 어디를 가든 늘 나와 붙어 다녀 주위에서 잉꼬부부 소리를 들었는데 지금은 한 줌 재가 되어버렸다. 가진 것 없는 내게 시집 와 호강 한번 못 시켜줬는데…. 아내에게 못 해준 것이 너무 많아 후회스럽다. 하늘에서라도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지내길 빌 뿐이다.
아내가 떠난 자리는 내가 메워야했다. 대리운전 일을 시작했다. 밤을 새워 일해 손에 쥐는 돈은 한달에 50~60만 원. 간이 제 기능을 못해 쉽게 피로가 몰려왔지만 아이들 생각에 꾹 참고 버텼다. 1년 남짓 일을 했을까. 더 이상 운전대를 잡을 수 없게 됐다. 시력이 점점 떨어져 접촉사고를 자주 냈다. 몸도 납덩이처럼 무거워져 제대로 가눌 수 없었다. 아직 한창 일할 수 있는 나이건만 자리에 누울 수밖에 없었다.
아직 부모가 한참 챙겨줘야 할 나이지만 중학생인 딸 선희(14·가명)는 제 동생 뒤치다꺼리까지 도맡고 있다. 한살 터울인 아들은 제 누나에게 엄마처럼 많이 의지한다. 집안일은 둘이 서로 나눠서 한다. 딸아이가 설거지를 하면 아들 녀석이 밥을 하는 식이다. 의좋은 아이들을 보면 그나마 마음이 놓이지만 제대로 먹이지도 못하고 냉방에서 전기장판을 깔고 겨울을 나야하는 처지를 생각하면 아이들에게 면목이 없다.
요즘 선희는 밤 9시가 넘어서야 집으로 들어온다. 학교수업이 끝나면 미용강좌를 들으러가기 때문이다. 다행히 기초생활수급대상자라 재료비는 들지 않는다. 혹시라도 내가 사라지면 동생을 자신이 책임져야하기 때문에 배우러 다닌단다. 미용학원 선생에게 일자리를 부탁하기도 했지만 아직 어리니 공부를 더 하라는 말만 들었다고 했다. 학교성적도 괜찮은 선희에게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말해 줄 수 없는 형편이라 안타깝다.
형편이 어려운 데도 착하게 자라준 남매를 보고 있으면 내게 과분한 아이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힘들어한다는 것을 알고 내 앞에선 좀처럼 엄마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축 처져 있는 모습도 보여주지 않는다.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해주고 싶지만 동사무소에서 매달 받는 17만 원이 수입의 전부여서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
병원에선 내 병이 나으려면 간이식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 처지에 무슨 수로 수천만 원이나 드는 수술비를 감당할 수 있을까. 게다가 간을 기증받아야 수술을 할 수 있을 것 아닌가. 선희가 또 나를 울렸다. 못난 내게 자신의 간을 떼어주겠단다. 엄마도 없는데 아빠마저 없으면 안된다면서. TV에서 아버지에게 간을 이식해준 아들을 봤다며 자기도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하나도 반갑지 않았다. 안 그래도 고생시키는 딸아이에게 또다시 의지할 순 없는 것 아닌가. 아빠로서 선희 앞에서 얼굴을 들 수가 없다.
김택수(40·서구 비산4동) 씨는 숨진 아내와 남매를 생각하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제 손에 낀 반지가 보이십니까. 아내가 제게 선물해준 것이지요. 하늘로 떠나보낼 때 아내 관에 함께 넣어주지 못한 것이 안타깝네요. 어떻게든 아내가 남겨준 아이들을 잘 키워야 할 텐데 이렇게 누워 있으니 앞이 막막합니다."
채정민기자 cwolf@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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