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기자노트-부정보다 무서운 불신

"당신들은 대표 자격이 없어!" "관리사무소와 한통속이야!"

이달 중순 수성구의 한 영구임대아파트 입주민지원센터 회의실. 동대표와 주민 등 100여 명이 입주자대표를 선출하기 위해 모인 이날 자리는 한 시간도 안 돼 난장판으로 끝났다.

일부 주민들이 주민대표들과 선을 긋다시피 뒷자리에 모여 앉을 때부터 사태는 어느 정도 예견됐다. 주민들 사이에 삿대질과 고함이 오갔다. 정떨어진다는 표정으로 자리를 뜨는 주민들도 있었다. 아파트 내 중요 사항은 주민대표와 상의해 결정한다던 관리사무소 측은 자리에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보름 가까이 영구임대아파트 취재를 하면서 주민들로부터 온갖 부정·비리에 대한 제보를 받을 수 있었다. 모두 돈에 얽힌 것들이었다. '기름값을 착복하고 있다' '누구는 돈을 받고 주민을 선동한다'는 소문들이 눈덩이처럼 굴러다니고 있었다. 선량한 고발자는 '별종' 취급을 받고 있었다.

방 벽지가 통째 곰팡이로 덮인 수성구의 한 영구임대아파트에서 만난 60대 노인은 연신 취재진에게 '미안하다' '죄송하다'고 했다. 그는 몇 개월 만이지만 관리사무소에서 벽지를 새로 발라주겠다는 연락이 왔다며 고마운 일이라고 했다. 무엇이 미안하고 고마운지 모르겠지만 그는 이곳에서 내내 그렇게 살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파트 내의 누구도 자신을 대변할 수 없다는 오랜 불신이 이 노인을 체념에 젖게 했을 것이다.

영구임대아파트 주민들은 의무만 있고 권리는 외치기 힘든 입장에 있다. 언제 관리비가 밀려 수도가 끊길지 모르는 마당에 늘 약자의 입장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당당하게 권리를 주장할 수 없으니 웅성웅성 불신만 나돌고 있다.

여기에는 임대사업자의 책임이 크다. 힘 없는 '세입자'로만 여겨 감추기만 해서는 안 된다. 일부 주민들의 고성방가식 민원에 진절머리가 날 법 하지만 입주민대표회의 구성 의무화와 각종 수익금 공개 등은 꼭 해야 한다.

칼바람이 부는 아파트 복도에서 두꺼운 점퍼를 입고 종종걸음치는 아이들에게까지 불신과 체념을 대물림할 수는 없지 않은가.

최병고기자 cb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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