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늑약(乙巳勒約) 이듬해이자 사실상 일제치하 원년이 되던 1906(병오)년으로부터 백년이 되는 2006(병술)년인 오늘까지, 대구는 그간 어떻게 천지개벽을 했고, 무슨 경천동지할 사건들이 있었을까.
산천이 여남은 변하고, 조손(祖孫)이 세 차례나 대물림을 할 동안 산하를 주름잡던 대구의 인걸들은 다들 어떻게 부침하며 사라져 갔을까. 곁들여, 8·15, 10·1, 6·25, 3·15, 2·28, 4·19, 5·16, 10·17, 5·18, 6·10 등, 암호들의 나열과도 같은 격변을 겪느라 힘없고 가난한 민초들은 또 얼마나 짓밟히고 눈물지었을까.
굵직한 사건사고들 가운데는 대구에서 발화되어 전국적인 관심사로 떠 오른 것도 적지 않다. 또 잘했건, 못 했건, 30년간 이 나라를 주무른 박·전·노 세 통치자들의 향리(鄕里)였다는 점에서도 대구는 실로 한국현대사의 진원처럼 회자되기 일쑤였다.
이제 물질세상은 예전에 비할 수 없이 풍요로워졌다. 곳곳에 아파트와 자동차, 휴대전화가 지천인 세상이다. 하지만 비록 너나없이 헐벗고 주리며 셋방에들 살았으나 마음만은 희망으로 부풀던 그때 그 시절이 문득 그리워짐은 웬일일까. 대구의 옛 이야기들을 새삼 들춰보고픈 까닭의 하나이기도 하다.
백 년 전 대구의 사회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당시 대구에 거류하던 일인들이 자신들의 정보지 형식으로 발행하던 주간신문인 지를 통해 어렴풋한 윤곽이 잡힌다. 일본 동경대학이 보관하고 있는 이 신문에 따르면 백 년 전인 1906년 초의 대구성내의 인구는 약 4만 명, 가구 수는 약 1만호였다. 물론 오늘날과 같은 광역이 아니라, 진동(鎭東), 달서(達西), 영남제일관(嶺南第一關), 공북(拱北)문 등 사대문 안의 인구이다. 그러니까 오늘의 동성, 서성, 남성, 북성로 안의 인구와 호수만을 대상으로 한 집계이다.
이들 상주인구 외에 관찰사(觀察使·도지사), 군수, 우체사(郵遞司), 전보사(電報司), 관리사정(官吏使丁·관속) 약간명과, 진영대(鎭營隊) 병사가 400명가량 주둔하고 있었다. 진영대는 형식상 관찰사의 지휘를 받는 방위군 성격의 군대였다. 그러나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가 조인되고, 7월 20일 '군사경찰훈령'에 의해 한국(조선)의 치안을 일본군이 담당한다고 통고된 이후, 사실상 대구의 일본군 수비대(헌병대)의 지휘통솔 아래 놓여 있는 허수아비 군대였다.
대구에는 이들 성내사람들과 관속 및 병사들을 상대로 한 조선인들의 각종 장삿집들이 제법 번창하고 있었다. 숙박과 술집을 겸한 주막집이 200여 곳, 각종 박래(수입)품을 파는 잡화점이 123곳, 담뱃집이 50곳, 고깃집이 40곳, 포목점이 40곳이었다. 이 밖에 기생집이 50여 곳 있었나 하면, 매음 전문의 '갈보 집' 역시 50군데 있었다고 앞의 신문은 특기하고 있다. 지체 높은 양반이나 부자들이 드나드는 기생집이 있듯, 보통사람들의 '객고'를 풀어주는 매음집도 같은 숫자로 있어야만 형평에 맞았는가 보다. 그러나 홀아비로 이주한 일인들의 필요에 의해 계획적으로 조성된 전문적인 집창촌(集娼村)인 이른바 서문 밖 유곽(遊廓)이 생기기 3년 전이어서, 여염집 형태로 산재해 있었던 모양이다.
이 무렵 대구의 일인 숫자는 1천200명 안팎으로, 남녀의 비율은 6.5대 3.5 정도였다고 한다. 영주할 터전을 닦기 위해 남정네들이 먼저 건너 온 까닭에 유곽의 필요성이 시급했던 것 같다. 이보다 13년 전인 1893년 9월 두 사람의 의약 및 잡화상이 나귀를 타고 부산에서 청도 팔조령을 넘어 온 것이 일인이주의 시작이었다. 관부연락선이 생기고, 경부선이 트이면서 이주는 러시를 이뤄, 한 달에 최저 80명에서 최고 250여 명이 '장사가 잘 된다'는 대구로 몰려오는 형국이었다. 이들은 헌병대용달상, 석유상, 음식점, 의사, 과자상, 조각사, 교원, 잡화상, 주상(酒商), 연초상, 사진사, 이발사, 승려 등의 다양한 직업을 갖고 있었다. '대구생활'이란 한 신문가십을 통해 이 무렵 대구사회상의 단면이 엿보여 흥미롭다.
* 많은 것은 지게의 수, 손님 끄는 매음부, 길가의 똥.
* 적은 것은 일인 처들의 공공심과 염치심.
* 높은 것은 매음부와 기생의 화대, 남문 밖의 교회당.
* 싼 것은 시장 부지료, 정거장의 지게 싹.
* 아름다운 것은 달성 산의 경치, 정거장의 야경.
* 불결한 것은 부녀자의 '서서 오줌 누는 짓', 성내의 도로.
*즐거운 것은 고향의 편지, 한어를 배웠을 때.
*슬픈 것은 이 곳에 미인이 없는 것, 독수공방.
*두려운 것은 매음집 주인과 경찰의 검문, 전염병.
백년 뒤에 읽어봐도 조선인들의 실업, 가난, 저노임, 저임대료, 비위생, 비교양의 정경이 여실하게 집약돼 있어 뒷맛이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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