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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춘추] 수몰 그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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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들여다보면/ 배추꽃 하얗게 핀 텃밭이 호수 속에 숨어있다/ 사진첩을 꺼내놓고, 조용히/ 앙증맞은 이름들을 들춰본다/.../ 이제, 기다림에 지쳐 늙어버린/ 얼굴들/ 몇 타래의 명주실을 풀어야/ 그리운 이의 고운 보조개를 만날 수 있을까/ 저녁 해가/ 호수의 방수로를 흘러가고/ 등잔불, 처마밑에 앉아/ 한 자 남짓한 퉁소를 불던/ 손톱 까아만 이름의 동무야/ 오늘밤도/ 곱게 퉁소를 불어라/ 고향이 호수에 파랗게 숨어 있다'.

어느날 가슴 한켠이 수몰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낯선 댐 하나가 하루 아침에 고향이라는 이름의 추억들을 모두 삼켜버리고 난 후, 나는 가슴에 남아있는 수몰의 흔적들을 찾으려고, 시간이 허락할 때마다, 그 호수를 찾아갔다.

맨몸으로 멱을 감고, 천렵을 하던 곳. 이젠 그 물에 발도 담글 수 없다. 어느날 상수도보호구역이 지정되면서, 호수 주변에서는 아무런 행위도 할 수가 없어졌다. 키 보다 높이 쳐진 철조망 울타리가 고향이라는 이름마저 영영 감금시킨 것이다.

멀리서 바라보면 물빛은 늘 그대로인데, 가슴속에 숨겨놓고 꼼지락거려보던 기억들 조차 희미해져버린 지금, 그리운 이름들도 하나씩 호적에서 지워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면, 가끔은 하늘 한쪽이 무너지는 꿈을 꾼다.

고향을 가진 사람들은 모른다. 고향을 가진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 줄. 불현듯 달려가도 만날 수 있었던 이름과 풍경들을, 꿈속이 아니면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얼마나 슬픈 일인지를 고향을 가진 사람들은 모르는 것이다.

무엇이든 있을 때는 아쉽지 않다. 하찮은 것들도 잃어버린 후엔 소중해 진다는 것을 모르고 살았던 것이다. 그런 어느날, 같은 추억을 간직한 고향 후배들을 만났는데, 그들도 늘 가슴언저리에 찰랑거리는 물소리를 담아놓고 산다는 것을 알았다.

요즘 사람들은 고향의 의미를 모른다. 호랑이도 죽을 때가 되면 고향을 찾는다고 했는데, 고향을 가진 사람들도 고향을 찾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고향들이 늙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자고 나면 빈집들이 생긴다는데, 아무도 그 빈집을 지킬 사람들이 없다는 것이다.이제 몇 년 지나지 않으면, 문전옥답에도 잡초가 무성해질 것이다.

김환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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