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파일 이튿날, 부처님 나투신 기쁨을 함께한 잔치의 여운이 남아있는 자리에 향기로운 비가 내렸다. 대지의 신을 달래고 생명을 키우는 감우(甘雨)이다. 오월의 신록이 눈부신 운제산(雲梯山) 중턱에 자리잡은 오어지(吾魚池)에도 하루종일 부처님 가피처럼 단비가 내렸다. 고요한 못으로 떨어지는 비를 흠뻑 받아들이고 있는 오어지는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검은 기암절벽과 기가 막힌 대조를 이룬다. 마치 한폭의 동양화를 보고 있는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포항에서 약 20km 서남쪽에 자리잡고 있는 운제산 오어사(吾魚寺)는 원효 성지 가운데 잊을 수 없는 곳이다. 그곳이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호반에 자리한 절이라는 특성 때문 만은 아니다. 원효 수행처인 이곳에 스며있는 맑고 큰 힘이 우리를 이끌기 때문이다.
◆ 신라 처녀들이 선망하던 원효
원효는 왜 파계하고 천촌만락(千村萬洛)을 떠돌아다녔을까. 그것은 자신의 말 한마디가 타인의 생사를 가로지르고, 아는 것과 되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글 잘하고, 말 잘하고, 칼 잘 쓰고, 기운 좋고, 노래 잘하고, 거문고 잘타는 화랑 중의 으뜸 화랑이던 원효는 뭇 신라처녀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어머니가 별이 품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남편(담날 혹은 담내)과 기도를 드리고 오다가 불등을촌(경산 자인) 밤나무 아래서 출산한 원효는 태어나자말자 어머니를 여의었다. 어려서 아버지를 낭비성 전투에서 잃고, 조부마저 병사하자 원효는 출가했다. 문수보살을 원불(願佛)로, '제2의 붓다'로 불리는 용수(龍樹) 보살을 사모하는 선배로 삼은 원효는 살던 집을 희사하여 '초개사' 절을 짓고, 밤나무 아래 태어난 곳에는 '사라사'란 절을 지었다. 자신 이후에 부처님의 도를 모르는 사람이 단 한명도 없기를 바란 원효는 경주 분황사 법당 동북쪽으로 따로 떨어져 나있는 '무애당'에서 화엄경소(華嚴經疏)를 짓고 있었다.
◆ 생로병사는 아상 때문
'무애당'이라는 당호는 화엄경의 '일체무애인 일도출생사'(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라는 데서 나왔다. 모든 것에 꺼리낌없는 사람만이 한길로 생사의 번뇌를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일체무애인 일도출생사'는 원효의 수행 목표였다.
그러나 어느날 원효는 파계해버렸다. 왜일까? 서른세살의 원효가 파계하던 그해 삼월삼짇날, 진덕여왕이 궁궐에서 열린 화엄경 법회에 원효대사를 청했다. 법회에는 진덕여왕과 진덕여왕의 뒤를 이어 태종무열왕이 될 김춘추의 아내와 딸(아유다) 그리고 김유신 아내 등이 참석했다. 원효는 "생로병사의 괴로움을 되풀이하는 것은 내가 내라는 '아상'(我相) 때문."이라며, "한번이라도 아상을 떠나서 중생을 사랑하는 마음을 밝히면 삼계에 거칠 것이 없는 보살이 되는 것"이라고 설파했다. 근데 그날 법회 뒷풀이에서 진덕여왕은 여인으로서 원효를 사모한다고 털어놓는 장면이 춘원 이광수의 장편 소설 '원효대사'(화남 출판사)에 나온다. 오만번뇌 끝에 사랑을 고백한 진덕여왕은 원효로부터 '세세생생 같이 하오리라.'는 답을 듣지 못한채 건강하던 사람이 일주일 만에 승하해버렸다.
◆ 아는 것과 되는 것은 달라
이 일로 가장 충격을 받은 사람은 원효였다. 사량(思量) 분별을 가지고 불법을 설하고, 경전을 쉽게 주석하려고 노력한 원효는 자신이 큰 바다의 물을 됫박으로 되려는 것이 아니냐는 회의에 빠졌다. "지나간 십 년 동안 내가 한 것이 무엇이냐?" 원효는 새삼 학문이나 지식이 사람의 혼을 움직이기에 얼마나 미흡한 지 깨달았다. 아는 것과 되는 것은 다른 것을 그때 깨달았다. 이후부터 원효는 행(行)을 중시했다. 오직 '行'만이 값어치가 있는 것으로 느껴졌다. 분황사를 떠난 원효는 장터를 떠돌아다니는 동냥승으로 알려진 고승 대안의 무애행을 직접 본 지 얼마 안돼 요석공주와 파계했다. 십년 이상 자신을 사모하며, 자신의 젖으로 나라에 바칠 큰 사람 을 길러바차고 싶다는 요석공주와 딱 사흘간 정을 나누고 원효는 요석궁을 떠나 자신을 소성거사 혹은 복성거사라 낮추며 꺼리낌없이 노래와 춤으로 대중을 교화하며 무애행을 실천한다.
◆ 원효 자장 혜공이 머문 오어사
"보살행은 중생의 오줌똥과 송장을 쳐주는 것이다."라며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고, 때로는 광대들이 가지고 노는 큰 박통을 얻어서 둘러메고 방방곡곡을 다니기도 하던 원효는 만년에 경북 포항시 오천읍 항사동 오어사(창건시 이름은 항사사) 원효암에 머물렀다. 진평왕대에 자장율사가 창건한 ''항사사에는 원효 뿐 아니라 원효의 스승인 혜공 의상 자장 등 신라 사성(四聖)이 머물렀던 명찰이었다. 어느날, 원효와 혜공은 장난기가 발동해 법력 내기를 벌였다. 죽은 물고기를 살려내는 재주를 겨루는데, 좀체로 승부가 나지 않았다. 딱 1마리로 승부가 나게 됐는데, 혜공과 원효가 서로 내 고기라고 우겼다는 데서 항사사가 오어사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기를 놔 준 곳이 오어지라고 '삼국유사'에 적혀있다. 국내에서 고기 어(魚)가 들어가는 사찰은 3개로 동래 범어사, 삼랑진 만어사, 운제산 오어사가 그것이다. '三魚' 중에 범어사나 만어사는 비유적으로 고기 어자를 썼지만 오어사는 직접 생물 고기와 관련이 있다. 근데 희안한 것은 원효와 혜공이 법력을 다툴 때는 이 일대가 항사천 계곡이었지 못이 아니었다. 댐은 일제 시대 이후에 막은 것이다. 원효는 1300년 후 오어사가 연못 옆 절로 방생 도량이 되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 원효 대사가 쓰던 삿갓 보존돼있어
오어사는 오어지를 마주보고 있는 일주문을 통해서 들어와야 제멋이다. 이 일주문 지나 절 바깥으로 돌아가면 오어지를 가로지르는 원효교가 나오고, 원효교에서 600미터쯤 올라가면 원효암이 나온다. 원효암 가는 길은 붉은 배 청개구리와 새끼 다람쥐만이 길손을 반겨줄 정도로 때묻지 않았다. 원효암의 원효대사가 벼랑끝에 위치한 자장암까지 가기 위해 구름(雲)으로 사다리(梯)를 놓았다고 해서 운제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설화도 내려온다. 원효성지 오어사에는 원효암과 자장암 외에 경북도 문화재자료(제88호)로 지정된 대웅전, 지난 95년 오어지에서 발굴된 동종이 보물(제1280호)로 지정돼있을 뿐 아니라 원효대사가 쓰던 삿갓까지 유물전시관에 보존돼있다. 지역 모 대학 박물관이 원효대사가 쓰던 삿갓의 탁본을 뜨려고 하나, 오어사 측에서는 원형이 훼손될까 허락하지 않고 있다.
글 최미화 편집위원 magohalmi@msnet.co.kr
사진 정우용 기자 vin@msnet.co.kr
도움 윤용섭 포항시장 직무대행, 오어사 장주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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