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의식 각성의 현장을 찾아서] (11)동래성의 비극을 되새기면서

부산시는 현대화된 대도시이지만, 과거 역사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 임진왜란의 첫 격전지였음을 말해주는 유적이 곳곳에 전한다. 전투의 현장이었던 성벽 일부가 남아 있고, 여러 기념물이 비극을 증언한다. 묻고 뒤지면서 그 자취를 더듬기로 한다.

동구 좌천동의 정공단(鄭公壇)에는 부산첨사 정발(鄭撥), 동래구 복천동의 송공단(宋公壇)에는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 순절한 두 지휘관의 혼령을 모셨다. 지금은 동래구 안락동 충열사(忠烈祠)에서 여러 전몰자에게 일제히 제사를 지낸다. 흩어진 시신을 수습해 묻은 곳에 임진전망유해지총(壬辰戰亡遺骸之塚)을 만들었다가 동래구 온천동 금강공원으로 이전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지 왕조실록을 보자. 1592년(선조 25) 4월 13일자에 사건 기록이 있다. "왜구(倭寇)가 왔다. 적은 바다에 자취를 숨기고 왔다. 부산첨사 정발이 마침 절영도(絶影島)에서 사냥을 하고 있다가, 조공하러 오는 왜(倭)인 줄 알고 방비하지 않았다. 진(鎭)에 미처 도착하기 전에 적이 이미 성에 올랐다. 발(撥)은 난병(亂兵) 가운데서 죽었다. 다음날 동래부가 함락되었다. 부사 송상현이 죽었다. 첩도 죽었다." 너무 간략하고 미비하다.

부산진순절도(釜山鎭殉節圖)와 동래부순절도(東來府殉節圖)라는 그림이 있어 둘 다 보물로 지정되었다. 부산진순절도는 첨사 정발이 성루에 올라 전투를 지위하고, 일본군은 기세가 대단하지만 아직 성을 넘어오지는 않은 모습을 보여준다. 동래부순절도에서는 송상현 부사가 정좌하고 있는 모습을 중심에 두고, 안에서 방어하는 군사들과 밖에서 공격하는 일본군을 그렸다. 도망치는 장졸도 보인다. 두 그림 모두 지휘관을 주인공으로 삼아 충절의 자세를 보여주는 데 치중해 전투의 실상을 알리기에는 모자란다.

진상이 어떤지 다른 여러 자료를 종합해 밝히려고 오늘날의 학자들이 계속 노력한다. 그 성과를 국립진주박물관에서 정리해 '새롭게 다시 보는 임진왜란'을 내놓았다. 국립진주박물관은 임진왜란 전문 박물관이다. 최초의 전투에 관해 서술한 내용을 보자. 많은 자료를 모아 다각도로 고찰한 결과의 요약이라고 생각된다.

"4월 13일 일본군은 절영도 앞 바다에 닻을 내리고 경상도의 관문인 부신진성 부근의 경계 상황을 정찰했다. 부산진성에서는 정발이 천여 명에 불과한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다. 정발은 근처의 선박을 모두 불 지르고, 군민들과 함께 성 안에 들어가 방어태세를 정비했다. 4월 14일 일본군이 성으로 쳐들어와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으며, 정발은 적탄에 맞아 전사했다. 남은 군민이 끝까지 분전하다가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다. 일본군은 이어서 서평포(西平浦)와 다대포(多大浦)의 방어진지를 유린했다.

4월 15일에는 일본군이 동래성을 공격했다. 동래부사 송상현, 수하 장수 홍윤관(洪允寬), 양산군수 조영규(趙英珪), 울산군수 이언성(李彦誠) 등이 군민을 거느리고 항전했다. 일본군은 포위망을 구축하고 "전칙전(戰則戰) 부전칙가도(不戰則假道)(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 달라)고 쓴 깃발을 내걸었다. 송상현은 "전사이(戰死易) 가도난(假道難)"(전사하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고 응답했다. 일본군의 일제 공격이 시작되자 군민이 일제히 방어했으나 성벽이 무너지고 성이 함락되었다. 송상현 부사, 조영규 군수와 함께 군민 대부분이 전사했다."

정발이 사냥을 나갔다가 정세를 잘못 판단하고, 진에 돌아가니 적이 이미 성에 올랐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누가 잘못 알고 보고한 말이 실록에 올랐다. 하루 여유가 있어 이탈자 방지책을 먼저 강구하고 군민과 함께 성안에 들어가 최선을 다해 방어하다가 전사했다. 공적이 제대로 기록되지 않은 것은 원통한 일이다.

동래성이 함락된 날이 4월 14일이라고 알도록 했는데, 사실은 4월 15일이다. 그날 송상현은 다른 관원들과 함께 군민을 거느리고 항전하다가 일제히 전사했다. 그런 사실의 전모를 기록하지 않고 첩과 함께 죽었다고만 했다. 첩이 있었으면 함께 죽은 것이 당연하니 특기할 사항은 아니다. 날짜가 틀리고 사실 기록이 미비하다. 국가의 공식 기록을 잘못 해서 역사 이해가 그릇되게 했다. 나라를 지키다가 죽은 사람들을 이중으로 원통하게 했다.

오늘날의 학자들이 사실을 밝혀 역사를 다시 쓰니 염려하지 말라고 할 것은 아니다. 송상현과 함께 순국한 다른 관원들을 찾아낸 것은 다행이지만, 다시 쓰는 역사에서도 "군민"(軍民)이라고만 하는 하급의 군인, 일반 백성에 관해서는 알려주는 것이 별반 없다. 성도 이름도 없고 숫자마저 파악되지 않으니, 실증사학에서는 거론할 길이 없어 덮어두어야 하는가? 문학으로 눈을 돌리면 사정이 달라진다. 내면 역사 증언에서 문학작품이 언제가 커다란 구실을 한다. 알려지고 연구된 것들만 해도 적지 않으나 둘만 들어 본보기로 삼기로 한다.

이안눌(李安訥)이 동래부사로 가서 1607년(선조 41)에 지은 '동래사월십오일'(東萊四月十五日)이라는 장시를 보자. 4월 15일이 되자 집집마다 처량한 울음소리가 들려 무슨 까닭인가 하고 늙은 아전에게 물었다. 늙은 아전이 대답하기를 그날 왜적이 동래에 쳐들어왔을 때 관민이 함께 막으려다가 장렬하게 전사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 내력을 서두로 삼고 그 뒤를 잇는 말이 다음과 같이 이어졌다.

합경구입성(闔境寇入城) 경계를 넘어 도적이 성 안에 들어오자,

동시화위혈(同時化爲血) 한꺼번에 모두들 핏덩이가 되었다.

투신적시저(投身積屍底) 몸을 날려 시체로 쌓일 적에

천백유일이(千百遺一二) 천 명 백 명 중 한둘만 남았다오.

소이봉시일(所以逢是日) 그런 연유가 있어 이 날을 맞이하면,

설전곡기사(設奠哭其死) 제사를 차리고 죽음을 서러워한답니다.

부혹곡기자(父或哭其子) 아비가 아들을 위해 곡하기도 하고

자혹곡기부(子或哭其父) 아들은 아비를 위해 곡하기도 한다오.

아들이 아비를 위해 제사를 차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비가 아들을 위해 제사를 차리고 곡을 하는 것은 천륜에 어긋난다. 싸워서 누가 이기고 누가 졌으며, 어느 장수는 공을 세우고 어느 장수는 배신했는가 하는 것이 역사라고 하지 말자. 공을 세울 자격조차 지니지 못하고 죽어간 미천한 백성들에게 전쟁의 상처가 깊이 남아 통곡하게 하는 현장에서 다시 통곡하지 않을 수 없다.

동래성의 비극을 두고 지은 시는 그 뒤에도 있었다. 신계영(辛啓榮)의 '동래유감'(東萊有感)을 하나 더 들어보자. 1624년(인조 2)에 일본으로 가는 사신의 임무를 띠고 동래에 이르러, 전란의 상처를 안고 황폐해진 모습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소조잔곽시래성(蕭條殘郭是萊城)쓸쓸하게 무너진 성이 동래라고 하니,

억착당년의미평(憶着當年意未平)그 날 일을 생각하니 마음 편치 못하다.

폐첩불수쇠초합(廢堞不修衰草合)버려진 성가퀴 시든 풀 속에 묻혀 있고,

황허무주석양명(荒墟無主夕陽明)황폐한 터전 주인 없는 채 석양만 밝다.

청산상대처량색(靑山尙帶凄凉色)푸른 산은 아직도 처량한 빛을 띠고,

유수장함오열성(流水長含嗚咽聲)흐르는 물이 흐느낌을 길게 머금었다.

의백상응여분재(義魄相應餘憤在)의로운 혼백 얽히고 울분이 남았는데,

각참금일해동행(却?今日海東行)부끄럽게도 오늘 바다 동쪽으로 간다.

앞에서는 눈에 보이는 광경을 그리고, 뒤에서는 멀리까지 돌아보면서 깊은 생각을 했다. 동래성이 폐허가 될 때의 원통한 사정을 두고두고 잊을 수 없어, 의로운 혼백들의 풀지 못한 울분을 이어받아야 한다고 했다. 국교를 다시 트는 일을 맡아 일본으로 가는 것이 부끄럽지만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하는 말로 끝을 맺었다.

부산시는 지금 번영을 누리고 있어 자랑스럽다고 하고 말 것은 아니고, 지난날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일본과 사이좋게 지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비극의 현장을 함께 돌아보아야 진정으로 가까워질 수 있다. 내밀한 사연을 증언하는 한시는 일본인들도 읽을 수 있어 다행인데 우리가 잊을 수 없다.

조동일 계명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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