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과 함께한 인생 60년…전희상 경운대 겸임교수

1945년 광복의 영광이 채 가시기 전인 1946년 세상에 첫 모습을 드러낸 매일신문과 기쁨도, 슬픔도 모두 함께 고스란히 호흡해 온 60년의 세월. 이젠 인생의 성숙기인 이순(耳順)을 맞은 매일의 동갑내기 전희상(60·도로교통공단 대구지부장) 씨. 총경으로 지난 2004년 3월 명예퇴직한 그는 매일신문과 함께 숨쉬며 인생의 고비고비를 지나온 지난 60년 세월을 잊을 수 없다. 경찰이었던 탓에 각종 사건사고로 마음 편할 날이 없었고 그럴 때마다 동갑내기 매일은 동고동락해 온 벗이자 동지였다. 현재 교통공단에 몸 담은 지 3년째이자 구미 경운대 경찰행정학부 겸임교수로도 재직 중인 그와 함께 지난 60년을 되돌아봤다.

1946년 10월 1일. 끝 모르던 가난과 극한의 이념 대립은 결국 피를 불렀다. '대구 10·1 폭동'. 당시 대구부청 앞에서 쌀을 달라며 시위를 벌이던 1천여 명의 군중에게 경찰이 발포해 1명이 숨지면서 대규모 유혈폭동으로 번져나갔다. 폭동은 경북 전역으로 확대돼 한 달 넘게 계속됐다. 공식 희생자만 사망 20명, 중상 50명, 행방불명 30명에 이르렀다. 당시 4개월 된 갓난아이였던 전희상(60) 도로교통공단 대구지부장은 "태어난 지 불과 두 달 만에 아버지를 잃었다."고 했다. 맹장염이 재발했지만 수술 시기를 놓친 탓이었다.

전 씨가 다섯 살이 되던 해인 1950년 6월 25일. 한반도는 다시 피로 물들었다. 큰형은 이듬해 군에 징집돼 최전방에서 빗발치는 총탄 사이를 누볐고 어머니와 어린 전 씨 형제들은 그대로 고향에 남았다.

"개떡이나 갱식이죽으로 하루하루 버텼죠. 이웃에 제사가 있을 때면 떡 한 몫을 더 얻으려고 남의 집 갓난아이를 들쳐업고 따라나서기도 했어요."

추석을 며칠 앞둔 1959년 9월 17일. 태풍 사라호가 전국을 강타했다. 낙동강이 범람해 대구 시가지가 물에 잠기고 100여 명의 사상자를 낸 최악의 재난이었다. 전 씨의 집도 개천이 범람하면서 꼼짝없이 고립됐다. "꼬박 이틀 동안 갇혀 있었죠. 식수가 없어 도랑물로 겨우 밥을 해 먹으며 버텼어요."

이듬해 전국은 사라호보다 더 거센 '4·19혁명'의 바람 앞에 놓였다. 앞서 경북고와 대구고 등 학생 수백 명이 분연히 일어난 '2·28 대구 학생 민주화운동'은 4·19 혁명으로 이어지는 도화선이 됐다.

당시 경북 김천시 감문중학교 2학년생이던 전 씨도 시위행렬에 끼었다. "1교시 종이 치자마자 가방을 싸서 집에 가버렸죠. 나름대로 파업을 했다고 할까요." 당시 전 씨에겐 4·19 혁명보다 더 어려운 것이 중학교 진학이었다.

"큰형의 설득 덕분에 중학교를 가게 됐지만 '먹고 살기도 힘든 형편에 애를 공부시킨다.'며 주변의 손가락질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 당시 그냥 눌러 앉았다면 지금쯤 농사를 짓고 있겠죠."

이듬해인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대한민국은 또다시 격랑에 휩싸였다. 전 씨는 아직도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1 의로 삼고….'로 시작되는 '혁명 공약'을 외우고 있었다.

한·일 기본조약 문제로 시위 물결이 퍼지던 1964년. 전 씨는 대학 진학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대학에 가고 싶었지만 장티푸스에 감염돼 무려 세 달이나 집에 누워 있는 바람에 꿈을 접어야 했죠."

전 씨는 이듬해 다니던 경북 선산군 농촌지도소를 그만두고 대구로 상경, 경북대 법대에 합격했다.

1966년은 삼성의 사카린 대량 밀수사건과 김두한 국회의원의 오물투척 사건으로 시끄러웠던 해였다. 당시 대학 1학년이던 전 씨도 일련의 사건을 지켜보며 분노를 금치 못했다.

"뿌리 깊은 부정·부패와 사회 현실에 분개했습니다. 매일신문은 제가 일련의 사건들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죠. 밤새 친구들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토론을 벌였습니다." 학원 사찰이 유난히 심했던 당시 때로는 정보계 형사들과 술자리를 하기도 했다. 그때 만났던 형사를 훗날 경찰 간부로 발령받은 부임지에서 조우하기도 했다.

1970년 7월 7일 경부 고속도로가 착공 2년 5개월 만에 개통했다. '콩나물 시루' 버스에 몸을 싣고 경북 칠곡 왜관 신동재를 넘어가며 삶은 계란을 먹던 귀향길도 추억이 됐다. 1973년부터 시작된 새마을운동으로 초가 지붕 고향집도 옛말이 됐다.

"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전에 친구들과 함께 대구에서 구미까지 걸어갔어요. 반나절을 걸어도 즐겁기만 했죠." 전 씨는 1976년 6월 경찰 간부 후보생으로 경찰에 입문했다.

1979년 10월 26일 오전 1시. 대구 북부경찰서 상황실 부실장으로 숙직 서던 전 씨에게 '비상대기' 명령이 떨어졌다. 라디오방송을 청취하라는 지시도 함께. 라디오에서는 믿기 힘든 소식이 흘러나왔다. '대통령의 유고'.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전갈이었다.

경찰인 그에게 1980년은 특히 괴로웠던 한 해였다. 잇따른 시위와 민주화 운동으로 집 밖에서 지내는 경우가 더 많았다.

"대구 남구 대명동 계명대 캠퍼스 앞 집회 현장에 나갔다 농구 골대와 불 붙은 연탄재를 피하다 다치기도 했죠. 온 몸에 멍이 가실 날이 없는 시절이었습니다."

1987년 6월. 민주화를 염원하는 시민들의 요구가 폭발했던 시절, 전 씨도 죽을 고비를 넘겼다. 집회현장에 출동했다가 시위 군중 50여 명에게 둘러싸여 집단 린치를 당한 것. "코뼈가 완전히 내려앉았고 허리를 크게 다쳐 병원에서 보름 동안이나 누워 있었어요. 앉지도 서지도 못할 형편이었죠. 그때 다친 코는 아직까지도 말썽을 부리네요."

1995년 4월 28일. 대구 상인동 지하철1호선 공사장에서 도시가스가 폭발, 100명이 죽고 107명이 다치는 대형 참사가 발생했다. "당시 경북 울진경찰서장으로 근무하던 때였는데 가족들이 해를 입었을까 걱정돼 오전 내내 전화를 했지만 불통이었어요. 마음이 다급했죠. 오후에야 겨우 안전하다는 소식을 듣고 안심했어요."

1997년 IMF 직후인 탓에 민심도 흉흉했다. 두산OB맥주 경북 구미공장이 문을 닫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구미공장이 광주로 이전한다.'는 유언비어가 떠돌았다는 것. "서장이 구미 출신이라 지역민들의 여론에 휘말려 루머를 단속하지 않는다는 오해를 받기도 했어요. 구미 4공단 기공식이 열리고 나서야 유언비어가 잠잠해졌죠."

2002년 한·일 월드컵 역시 잊을 수 없는 추억. 대구에서 열리는 3, 4위전 표를 샀다는 것. 1장당 3만 원이던 입장권은 무려 30만 원까지 치솟았다. "'그냥 팔까'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다시 못 올 기회라는 생각에 가족들과 함께 경기를 관전했어요. 그 당시 감격은 잊을 수 없네요."

2003년. 대구 중앙로 지하철참사가 온 국민을 충격과 공포에 몰아넣었다. 그해 8월엔 대구 하계유니버시아드가 성공리에 개최됐다. 당시 경북지방경찰청 정보과장이었던 전 씨는 북한미녀응원단의 행보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경북 예천에 다녀오던 응원단원들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진이 담긴 현수막이 비에 젖는다며 버스에서 뛰어내릴 때 정말 당황했습니다. 한편으론 북한의 실체가 알려진 것 같아 잘됐다는 생각도 들었죠."

2004년 3월 명예퇴직한 전 씨는 현재 구미 경운대 경찰행정학부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또한 도로교통공단 대구지부장으로 3년 째 근무 중이다.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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