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동해안 1천리를 가다]감포 송대말 수족관

이젠 고기 대신 아이들 놀이터로

특별한 장소에 대해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감포의 송대말(松臺末)도 그 중 한 곳이다. 송대끝 아래 바다와 바위에는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 바닷물과 바다의 바위를 활용해 조성한 수족관과 송대끝에서 수족관을 오르내렸던 긴 나무다리, 바위 틈 사이에 지은 빨간색 지붕의 찻집이 있었다. 그러나 광복과 한국전쟁 때 수족관을 제외한 모든 시설들이 없어져 그 흔적은 이제 빛바랜 사진속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우연히 만난 빛바랜 사진들='동해안 1천리를 가다'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1940년 초에 송대끝 수족관 주변에서 촬영한 빛바랜 흑백사진 몇 장을 구했다. 이 흑백사진들에는 지금은 없어진 송대끝에서 절벽 아래 바다 바위 사이에 있던 수족관을 오갈 수 있는 나무다리와 일본식 건물인 찻집이 담겨 있었다.

한 장은 중년의 장정들이 단기 4276년(1943년) 6월 수족관의 옛 모습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사진속 주인공들은 대부분 운명을 달리해 찾을 수가 없었다. 또 다른 한 장의 사진은 7명의 아름다운 처녀들이 다정하게 팔장을 끼고 촬영한 것이다. 이 사진의 주인공을 수소문 끝에 찾을 수 있었다. 겨울이라 검은 두루마기를 입은 모습으로 사진에 나온 주인공은 감포에서 태어나 감포에서 평생을 산 최분순(84) 할머니다.

최 할머니가 18세 때인 1940년, 대구로 시집간 친구가 친정인 감포에 왔을 때 엄한 어른들 몰래 친구들과 함께 송대에 갔다가 읍내 사진관의 사진사를 불러 찍은 사진이었다. 이 흑백사진 맨 위에는 전망대 같은 것이 있고 이곳으로부터 바다로 내려오는 긴 나무다리가 있다. 그 나무다리 옆으로 바위 틈에 일본식 건물 한 채가 서 있고 나무다리에서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처녀들이 다정하게 포즈를 취했다. 요즘은 그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든 시설을 배경으로 찍은 보기 어려운 사진이다.

◆최분순 할머니와 다시 찾은 송대말=지금의 모습과 비교해 보기 위해 흑백사진을 들고 다리가 불편한 최 할머니와 함께 현장을 갔다. 송대끝에서 좁은 길을 따라 가니 옆으로 하얀 등대가 서 있다. 이 등대는 지난 2001년 말 바로 옆에 새로 지은 등대에 그 임무를 넘겨 주었다. 좁은 길 앞은 바다로 떨어지는 낭떠러지로 군 철조망이 처져 있고 철조망 5, 6m 아래에 있는 넓은 바위 앞은 망망 대해다.

최 할머니는 흑백사진을 보면서 옛 추억을 더듬었다. "사진찍을 당시만 해도 송대에는 해송이 지금보다 많아 울창했고 주변에는 잔디가 깔려 있어 바다와 함께 어우러져 경치가 장관이었다."고 했다. 그날도 소나무 아래 잔디에 앉아 시집간 친구의 결혼 생활에 대한 이야기 등을 나누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었다고 했다.

"그때 송대끝 아래에 일본인이 만든 수족관을 구경했지. 수족관 아래로 내려가는 길에 난간을 갖춘 나무다리가 길게 있었고. 방구(바위)와 방구 사이에 돌이나 시멘트로 칸을 질러 10개 정도되는 자연 수족관을 만들어 방어 전복 돔 등 각종 고기를 키웠어. 또 절벽 중간쯤 방구 사이에 빨간 지붕의 일본식 집을 지어 차도 팔고 그 옆 건물에서는 식당과 술집을 겸해 기생들이 접대를 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구경거리가 별로 많지 않았던 그 시절 이곳 송대와 수족관을 구경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했다. 이곳 찻집과 술집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일본인과 감포 유지 등으로 이곳에서는 초창기에는 5전을 내고 입장해 야생 딸기도 따먹고 수족관 구경도 하고 차도 마시는 등 사교장이었다고 했다. 감포읍내에서 올라온 일본 기생들이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도 하고 술도 마시는 풍류의 장소이기도 했다. 어떻게 바위를 활용해 수족관과 구름다리, 찻집을 만들려고 생각했는지 신기했다.

할머니는 결혼해서 30대 후반쯤 친구들과 화전놀이를 하기 위해 이곳에 들렀었고 이제 40년의 세월을 훌쩍 넘어 다시 찾았지만 너무도 많이 변했다고 했다. 해송과 잔디는 많이 없어지고 주변에는 당시 없었던 밭과 집들이 들어섰다고 했다.

"꿈 많던 그 시절에 함께 찍었던 사진 속의 친구들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겠다."며 "세월을 돌려 그 때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 보고 싶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야 최 할머니뿐이랴.

◆수족관 이야기=감포읍에 살고 있는 양무줄(88) 할아버지는 이 수족관의 주인이 일본에서 건너와 감포어업조합에서 중매인을 했던 50대 중반의 오다 도메기치가 1930년대에 만든 것으로 기억했다. 양 할아버지는 "해방전만 해도 이 수족관은 일본인을 중심으로 돈깨나 있었던 사람들이 바다에서 자라는 고기를 보며 차나 술을 마시며 사교를 할 수 있었던 장소였다."며 "내가 알기로는 일본인 주인이 이곳에 관리 등을 초대해 접대하고 조선총독부로부터 기선 저인망(큰 덩구리배) 허가를 받는데 활용한 것 같다."고 기억했다.

이주봉(80·오류리) 할아버지는 "해방된 이후부터 한국전쟁 사이에 없어진 이 수족관을 다시 정비 복원해 고기 등의 생태견학 및 학습장으로 활용하면 좋은 관광자원이 될 것"이라고 제안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찾았던 추억의 장소들이 하나 둘씩 사라졌다. 이곳 육지끝인 감포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어서 이 송대끝 수족관도 빛바랜 흑백사진 속에서만 볼 수 있을 뿐이다.

경주·김진만기자 fact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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