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근무하고 있는 민족사관고등학교에는 최근 몇 년 동안 해마다 미국의 명문 사립대학에서 학생선발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집단으로 찾아와서 입학설명회를 공동으로 개최해 왔다. 물론 그들이 강원도의 횡성 산골에 있는 이 학교만을 위하여 온 것은 아니라고 본다. 국내에 국제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는 고등학교도 있지만, 일본, 대만, 홍콩, 싱가포르, 중국 등 아시아권에 있는 고등학교들을 방문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한편으로는 자기네의 학교를 홍보하고 또 한편으로는 이곳의 학생들을 어떻게 교육하고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온 것이다. 그들은 자기 학교에서 공부하게 할 인재들을 찾아서 이곳에 까지 온 것이다.
이 대학들은 소위 아이비리그라고 일컬어지는 명문대학군에 속해 있거나 그와 동격인 세계적 수준의 이름난 대학들이다. 자기네 나라 안에서 가만히 기다리기만 해도 해마다 2백만명이 넘는 국내의 학생들 중에서 뿐만 아니라, 천하의 영재라고 할 수 있는 우수한 학생들이 세계의 각지에서 다투어 모여드는 대학이다. 그런 대학임에도 불구하고 세계적 영재들을 자기 대학에 유치하기 위하여 막대한 비용을 들여 아시아의 여러 곳, 특히 이곳 횡성의 산골에까지 찾아 온 것이다. 어디 아시아에만 다니겠는가? 오늘날 국내의 부실한 대학들이 학생을 유치하여 정원을 채우기 위하여 다니는 것과는 성격상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러한 세계적 수준의 명문대학에 졸업생을 입학시키는 일은 어느 고등학교에서나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국제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는 국내의 다른 고등학교들도 공통으로 느끼는 사실이지만, 국내의 소위 일류대학에 입학시키는 일이 그런 세계적 명문대학에 입학시키는 일보다 오히려 훨씬 어렵다는 것이다. 그것은 국내 대학의 학생선발원칙이 지나치게 경직되어 거기에 맞추어 교육을 운영하면 상당한 정도로 영재교육이나 전인교육의 프로그램을 유보하거나 포기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에 놓이게 되기 때문이다.
이에 비하여 외국의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각기 평소에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면서, 또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여 준비하면, 대등한 수준의 여러 대학 중에서 자신을 선택해 주는 곳이 있게 마련이다. 명문급 대학 중에서 이 대학이 아니면 저 대학에서 기회를 제공한다. 학생이 대학의 선발제도에 맞추어 대학입시를 준비해야 한다기보다는 선발제도가 허용하는 틀 속에서 자신의 개성을 살려 실력을 쌓아둔 증거를 충실히 보이면, 여러 대학이 경쟁적으로 학생을 데려가고자 한다. 그런 대학들은 자기네들이 맡아서 교육시킬 만한 인재라고 판단되면 어떻게든지 뽑아가려고 한다. 이런 조건 하에서는 고등학교가 자유롭게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있는 운신의 폭이 훨씬 넓어진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대학들은 학생선발에서 지나치게 기계적, 계량적 공정성을 중시한다. 그래서 누구를 맡아서 교육시킬 것인가보다는 어떻게 하면 명쾌하게 선발과 탈락을 구별지울 것인가를 생각한다. 어느 과목에서 몇 점, 어느 부분에서 몇 퍼센트, 어느 집단에서 몇 위인가 등 모든 것이 엄격히 계량화되어 있다. 대학의 전문적인 눈으로 충분히 관찰할 수 있는 각종의 질적인 자료들도 평가의 내용에서 제외한다. 이런 제도 하에서는 학생의 성취동기나 포부수준이나 창의력이나 잠재력 등이 선발과정에서 제대로 노출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대학은 결국 학생의 능력을 질적으로 평가하는 전문적 역량 자체를 스스로 포기하는 셈이 된다. 질적인 평가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은 상황에서 학생들은 언제나 점수 따기에 매달리게 되고 "족집게 과외"와 같은 방법으로라도 점수를 잘 따기 위한 노력을 필사적으로 해야 한다.
이미 우리나라의 대학은 학생선발에 있어서 자율성을 제한하는 제도와 정책에 길들여져 있다. 거꾸로 보면, 이러한 현상은 우리나라의 대학에 과연 어떤 사람을 뽑아서 어떤 사람으로 교육해야 하는가를 두고 고민하게 하는 고집스런 건학의 이념 자체가 있는지에 회의를 느끼게 한다. 대학은 제도적 규칙에 의해서 배당된 사람들을 교육하는 곳이 아니다. 대학은 자체의 건학이념, 그리고 개성에 따른 역량을 발휘하면서 육성할 수 있는 인재를 자체의 의지로 선발하여 교육하는 곳일 때 그 사회로부터 부여된 혹은 자처한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이돈희 민족사관고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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