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 행복의 조건

술에 곯아 떨어진 세 명의 선비를 저승으로 잡아 온 地府使者(지부사자)는 사색이 됐다. 명부에 없는 생사람을 잡아 온 것이다. 대책회의 결과 염라대왕은 다시 환생을 명하지만 선비들은 그냥은 돌아갈 수 없다며 보상을 요구했다.

먼저 나선 선비는 문관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벼슬을 원했다. 염라대왕은 흔쾌히 약속했다. 두 번째 선비는 무관의 온갖 직책을 요구했다. 물론 이번에도 오케이였다. 이미 벼슬자리는 두 명의 선비가 먼저 차지한 터라 마지막 선비는 달라고 할 게 마땅찮았다.

어진 부모님 모시고 착한 아내와 아들딸 손잡고 오순도순, 무병장수하게 해 달라는 게 고작이었다. 벗이 찾아오면 담근 술 나눠 먹고 맑은 날이면 강에 나가 고기도 잡으며 들로 산으로, 한가로이 살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별것 아닌 요구에 염라대왕은 분노했다. '염라대왕인 나도 가질 수 없는 꿈'이라며 지나친 욕심을 탓했다.

조선말기 소설책 三說記(삼설기)에 실린 三士橫入黃泉記(삼사횡입황천기)의 내용이다. 부귀영화나 공명은 모두 헛된 것일 뿐, 논밭 일구며 가족과 함께 걱정 없이 사는 일이야말로 사람의 참된 행복이라는 내용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이야기다.

아들딸 손잡고 걱정 없이 살고 싶은 마음은 동서고금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다. 가족을 소재로 한 우리 드라마가 동남아 등지에서 열풍을 일으키고 서구 사람들이 우리의 전통을 주목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孝(효)로 귀결되는 가족관계 때문이라는 분석은 그들 역시 이런 삶을 꿈꾸고 있다는 말과 다름이 아니다.

걱정 없이 오순도순 산다는 게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궁하면 돈과 양식이 고민되고 먹고 살 만하면 병과 죽음이 겁주는 게 다반사다. 자식 농사는 더더욱 어렵다. 공부를 못해도 걱정, 다쳐도 걱정, 길을 잘못 나설까도 걱정이다. 그래서 자식은 마음먹은 대로 안 된다고들 한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면 걱정거리는 행복으로 변한다는 말도 있다. 돈과 집이 없어 행여 도둑이 들세라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는 행복한 거지의 유머는 결코 허황된 잡소리만은 아니다. 집착하고 매달리지 말라는, 집착이 되레 불행을 낳고 행복을 몰아낸다는 생활의 지혜를 담고 있다.

선거 때면 표를 구하러 나서는 이마다 삶의 질을 높이겠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잘살게 하겠다고 공약한다. 삶의 질 향상이란 숱한 구호가 반복됐지만 갈수록 살기 어렵다는 아우성이 늘어난다. 새 법을 만들고 제도를 뜯어고치는 데도 어렵기만 하다면 고치고 새로 만든 일이 잘못일 수도 있다.

학교 體罰(체벌)을 금지하는 법안을 준비 중이라는 소식까지 들린다. 때려서 키우는 일을 누가 바라겠냐마는 그렇다고 회초리에 깃든 訓育(훈육)의 정신까지 법으로 어찌해 보겠다는 발상은 이해하기 힘들다. 성매매 방지법을 만드니 되레 성매매는 통제불능의 상태다. 집값을 잡는다는 엄포가 서민들의 내집 꿈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검은 돈을 차단하겠다는 의욕이 돈을 최고의 가치로 올려 세우고 있다. 평등의 정책이 계층 간 이동을 막는 불평등의 고착을 부른다.

독재의 시대 민주의 시위는 희망이었다. 그러나 민주의 시대에 만연한 시위와 구호는 사람들을 지치게 만든다. 지나침 때문이다. 잘났건 못났건 모두에게 소중한 민주의 꿈은 앞선 사람들이 물러설 줄 알아야 이뤄진다. 스포츠나 바둑 할 것 없이 좋은 승부를 바란다면 먼저 어깨에 힘을 빼라고 한다.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삶의 質(질)을 높이겠다는 게 오늘 정치의 話頭(화두)라면 먼저 정치의 어깨에서 힘부터 빼야 한다. 옳다고 여겨 몰아붙인 정책이 화근을 만들고 병을 키운 사례는 세상에 늘려 있다. 한 면이 어두우면 다른 한 면은 빛이 있다는 평범한 사실은 무시 못할 진리다. 내것을 고집하는 똑똑한 사람보다 남의 말에 귀 기울이는 어수룩한 이가 삶의 질을 맛낼 수도 있다.

서영관 논설위원 seo123@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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