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초라하고 쓸쓸한 거리로 변했지만 대구의 '술 문화'는 한때 중구 향촌동(香村洞)이 지배했다. 1950년대 중반부터 60년대 후반에 이르는 10여 년 남짓한 이 기간은 가히 '향촌동의 전성시대'라 할 만했다.
크고 작은 각종 요리점은 물론, 수많은 막걸리집, 곱창소줏집, 정종대폿집, 맥주집, 위스키시음장, 스탠드 바 등이 전후 미국 원조시대의 인플레경기를 타고 남한 제일의 문화도시이자 군사도시가 된 대구의 밤을 흥청대게 만들고 있었다.
향촌동이 대구의 대표적 주점거리가 된 것은 탁월한 입지의 덕이었다. 무라카미쵸(村上町)로 불리던 일제 강점기부터 이곳이 식당 밀집지역이 될 수 있었던 까닭도 번화가와 인접해 있었기 때문이다. 북성로·서문로·중앙로·포정동을 낀 주변엔 우선 관공서가 많았다.
도청을 비롯해 경찰서·세무서·병사구사령부(병무청)·은행·우체국·시장·역·극장·공회당·양품점들이 반경 500여 미터 내에 즐비했다. 이곳에 근무하는 직원들과 방문객들의 식사나 퇴근 후 한잔을 위해선 향촌동 만한 골목도 없었던 까닭이다.
그렇다고 향촌동은 관공서 브로커나 '술상무'들의 은밀한 숙덕공론의 장만이 아니었다. 피란문인들과 향토의 문화예술인들이 전쟁의 후유증을 앓으며 실향과 이산의 아픔을 한잔 술로 달래야만 했던 곳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향촌동은 오늘날처럼 주당들의 혼을 빼는 퇴폐와 환락이 춤추는 곳이 아니었을 뿐더러, 입맛대로 골라먹는 질펀한 먹자골목도 아니었다.
더러 고급 방석집도 없진 않았지만, 대부분 10여 평 남짓한 기차화물칸 같은 실내의 딱딱한 나무의자에 걸터앉아, 대폿잔을 들이켜며 전후의 정치 사회적 피폐상과 허무감에 대해 울분을 토하는 곳일 경우가 더 많았다.
지하 '녹향음악감상실'에서 브람스나 베토벤에 취해 있던 예술인들과 그 지망생들은 해가 지면 거리로 나와, 허기진 예술에의 꿈을 한잔의 술로 달래던 곳 역시 향촌동이었다. 광복군 출신 예비역 준장 장호강(張虎崗) 시인은 57년부터 두 해 동안 경북지구병사구사령관으로 있으면서 향촌동에 살다시피했다.
1958년 2월 22일자 대구 매일신문에 그는 '향촌동'이란 산문시를 실었는데, 군데군데에 그의 단골술집 이름을 넣어 흥미를 끌었다. '… 이태백과 울고 간 달이 돌아와 멋을 더하면 '보래로'를 지나 동구로 들어가 보라. 잔잔한 '호수'가에 '갈매기' 떼 지어 날고, 푸른 두던에 '백록'이 뛸 때, '장미'꽃은 향 내워 반겨 주리라. 거기 요조한 선녀들 황홀한 '금관'을 쓰고, '금붕어' 드레스로 '황금마차'를 휘몰아 욱어진 '송죽'사이로 풍류 길손을 맞아준다면 구태여 겸양하지도 못할 것. 관광의 행렬이 '파리'와 '와싱톤'과 '모나코'에서 십자형 광장으로 닿았는데….'
58년 7월 15일 장호강 시인은 국방대학교 입교를 위해 대구를 떠났다. 그는 다시금 '이별의 잔을 들어'(부제'대구를 떠나며')란 시로 향촌동과의 작별을 아쉬워했다.
'낙동강은 하냥 남으로 흐르는데/ 내사 바람 따라 북으로 떠나야 하느니/ 인간의 무상함이 새삼스럽지 않다 해도/ 호올로 몸은 가도/ 사랑은 여기 남아있는데/ 이 거리 골목마다 나의 노래는 깔려 있는데.// 흙냄새 풍기는 구수한 사투리/ 흰 박꽃처럼 피어있는 인정/ 나를 아껴주는 벗/ 진정 사랑하는 이들의/ 비슬산과 금호강처럼 아름다운 이름은 아닐지라도/ 달구벌의 추억과 더불어 영 영 잊을 수 없는 모습….'
한때 대구 주당들의 정신적 고향이었고, 전후 유흥경기의 진원지였으며, 대구 제일의 '거나한 소비'와 인파가 몰리는 골목의 하나여서, 양조회사들 사이에 사활을 건 격전장이기도 했던 향촌동. 그러나 이제는 찾는 이 드문 늙은 여배우처럼 쓸쓸히 황혼 길을 걷고 있는 향촌동을 보노라면 세월의 무상함과 더불어, 가버린 옛 주당들의 얼굴이 몹시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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