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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암칼럼] 꽃동네 신부와 통일부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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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멍청한 듯하면서도 해학적인 터키의 철학자가 시골길로 먼 여행을 떠났다. 날이 저물어 주막집 여관방에서 하룻밤을 묵게 된 그는 이튿날 새벽 일찍 길을 떠나야 할 사정이 있어 여관 주인을 불러 당부했다.

'주인장 나는 갈 길이 머니 해 뜨기 전에 일찍 깨워주시오' 그날 밤 좁은 여관방에는 마침 神父(신부)님 한 분이 철학자 바로 옆에 같이 자게 됐다. 두 사람 다 머리맡에 모자를 벗어두고 잠이 들었다.

이튿날 새벽, 주인이 철학자를 깨우자 채 잠이 덜 깬 철학자가 얼떨결에 머리맡의 신부님 모자를 바꿔 쓰고 나왔다.

동이 틀 무렵 개울가에 다다라 세수라도 하려고 냇가에 꾸부리고 앉던 철학자가 깜짝 놀랐다. 개울물 속에는 웬 신부 모자를 쓴 사람이 비치는 게 아닌가. 그러자 멍청한 철학자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바보 같은 여관주인이 깨우라는 나는 안 깨우고 신부를 깨웠군!'

터키 東方正敎會(동방정교회) 신부들은 챙이 둥근 검은 모자를 쓴다. 이 철학자의 해학은 모자 속의 진짜 얼굴(실체)보다는 모자가 주는 겉모습의 이미지(형상)에 더 쉽게 기울어져 껍질과 본질을 혼동하는 사람들의 인식을 꼬집고 있다.

사흘 전 신문기사에서 서로 다른 사연으로 나란히 보도된 두 사람의 신부님 기사를 보면서 터키 철학자의 풍자를 생각해 보게 된다. 한 분은 30년간 가난하고 버려진 사람들을 위해 헌신해온 '꽃동네' 오웅진 신부님. 또 한 분은 통일부 장관 후보로 임명돼 국회에서 자질검증 청문을 당한 이재정 聖公會(성공회) 신부님이다.

오 신부님 기사는 3년 전 보조금 예산관리 잘못과 업무방해를 했다는 혐의로 기소됐다가 이날 고법에서 무죄선고를 받았다는 소식이고.

李(이) 신부님은 지난 대선 때 기업체로부터 10억 원의 불법정치자금을 받아 노무현 후보에게 전해준 죄로 벌금형을 받았음에도 다시 장관 후보로 지명돼 '그런 사람이 무슨 장관 자격이 있느냐'는 등 야당의 비난을 받았다는 뉴스였다.

두 신부를 비유해 보기 전에 철학자의 모자 풍자를 한 번 더 풀어보자. 철학자가 신부 모자를 쓰고 갔다고 해서 철학자가 신부가 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여관에 남은 신부가 철학자 모자를 대신 쓰고 갔다고 철학자가 될 수도 없다.

마찬가지로 장관 후보라는 정치인 모자를 바꿔 쓰더라도 올바른 인권의식과 종교적 사랑과 신념을 지니면 모자 속의 실체적 신부로서 존경받을 수 있다.

그러나 신부 모자를 쓰고 있더라도 탄압받는 인권에 대한 사랑과 가슴속에 인도적 눈물이 없다면 그 모자 속의 진짜 얼굴은 모자만 바꿔 쓴 철학자처럼 '가짜'가 될 수 있다.

장관 후보 이 신부의 경우는 어떤가.

'김일성에 대한 평가는 역사가 할 것이며 아직 과거사가 정리되지 않았다'는 놀라운 답변을 했다.

반세기를 견뎌온 이산가족, 상이군경, 전몰장병 유족들의 슬픔과 고통을 눈앞에 보고서도 또 무엇을 더 정리할 과거사가 남아있다는 것인가. 남침전쟁으로 산화한 전몰장병의 넋에 대한 경건함은 고사하고 고통받는 이웃과 동포에 대한 성직자로서의 사랑과 따뜻한 인도적 가슴이 느껴지지 않는 답변이다.

북한의 인권유린도 '검증방법이 없고 사실인지 판단할 수 없다'고 말한다.

탈북자들의 처절한 절규와 증언들이 장관 후보 신부 귀에는 모두 다 사실로 판단할 수 없는 거짓말이요, 헛소리로 들리는 모양이다.

통일부장관은 이념투쟁가보다는 북한동포의 기아와 인권에 눈물 흘릴 수 있는 가슴 따뜻한 사람에게 맡겨야 옳다.

김정길 명예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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