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증조부·조부 동학운동 참가 '혁명' 재평가 받은 대구 한명수씨

"가슴에 묻은 '동학'의 아픔…112년 만에 풀었다"

"동학농민'반란'이라고요, 아니요 동학농민'혁명'입니다."

동학농민 '반란군'들이 112년 만에 '혁명가담자'로 명예회복했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국가적 차원의 정당한 평가가 내려진 것.

최근 전국 780여 명의 후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 등록통지서'를 받았는데 이 중 대구에서는 유일하게 한명수(52) 씨도 포함됐다. 한 씨는 1894년 동학혁명 당시 경북 선산군 선산읍에서 혁명가담자로 활동했던 한교리(1848~1929)의 증손자, 한정교(1879~1944)의 손자. 한 씨는 "다른 후손들 대부분은 80, 90대이지만 나는 늦둥이로 태어나 유족에 포함되게 됐다."며 "당시 경상·충청·전라도 등에서 연인원 100만 명이 참가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조선왕조와 일본 침략기를 거치면서 심한 탄압을 받아 동학혁명 후손들이 침묵하면서 잊힌 것 같다."고 말했다.

한 씨에 따르면 46세의 나이로 동학농민군 선봉대로 나섰던 증조부와 16세의 조부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 이후 산에서 숨어지낼 수밖에 없었다.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이들은 반란을 기도한 사람들로 낙인 찍혀 단순 참가자를 제외하고 잡히는 대로 처형됐기 때문이란 것.

"증조부와 조부는 전국 방방곡곡을 전전하며 피신하다 오지인 경북 상주군 옥성면 주아리로 이주해야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일본사람들이 면사무소를 설치하자 다시 더 깊은 마을인 웅박골로 옮겼다더군요. 남의 농사를 지으며 근근이 입에 풀칠을 하고 살았다며 밥상 교육을 하시던 아버지의 말씀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한 씨 가족들도 동학혁명 가담 사실을 직계 가족들에게만 알렸다고 했다. 혁명에 참여한 사람들 중 일부는 강원도나 경북 봉화군 등으로 이주하기도 했고 심지어 성(姓)을 바꾼 이들도 있었다는 것. 상황이 이렇다 보니 증·조부의 묫자리를 남겨둔 것만 해도 '천운'이라고 했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지 112년 됐지만 늦게나마 후손으로 인정받아 선친들의 정신을 후세에게 자랑스럽게 얘기할 수 있어 다행스럽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족의 경우 구전이나마 됐지만 대부분의 집안이 혁명에 가담한 사실을 가슴에 묻고 세상을 하직한 바람에 후손들이 이런 자랑스런 사실조차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는 현실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김태진기자 jin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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