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한 사연이 있다는 제보를 받고 12월 28일 오후 경북 성주의 한 고등학교를 찾았다. 오전부터 내린 비 때문에 도로가 막혀 약속 시간이 20분이나 지난 상황이었다. 다행히 삼남매의 사연을 전한 이 학교 김판돌 교사는 너그럽게 기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신 그는 아이들을 집으로 데려다 줄 것을 부탁했고, 아이들을 돌보고 있는 조부모를 만나야 했기에 흔쾌히 부탁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아이들이 집으로 가는 길, 버스를 놓칠 때마다 걸어간다는 길은 요즘 세상이 아닌 양 잔인하게 여겨졌다.
목도리를 친친 감은 지민(18·여)이 동생 지수(17·여)를 데리고 승용차에 올라탔다. 작고 다부진 얼굴을 한 지민. 수년간 집안 살림과 동생들을 돌본 소녀 가장의 흔적이 역력했다. 자매는 약속이라도 한 듯 "10분 후면 집에 도착한다."며 들뜬 기색이었다. 성주 시내를 돌아가는 버스를 타면 50분이 걸리지만 차로는 가깝다는 친절한 설명까지 덧붙였다. 잠시 뒤 아이들이 가르쳐준 길이 나타났다. 산 중턱을 향해 난 꼬불꼬불한 왕복 2차로. 고갯마루를 넘고 있다는 사실은 한참이 지나서야 알았다. 급커브 경사까지 이어졌다. 아이들은 하루에 버스가 4대뿐이라 버스를 놓칠 때나 토요일에는 이 길을 두 시간씩 걸어 집으로 간다고 했다. 산중턱으로 난 좁은 고갯길을 눈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걸어다니는 자매. 지민이가 교복 치마 밑에 체육복 바지를 입은 것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지민이는 힘들지 않다고 했다. 오히려 시골이 편하다고 했다. 편한 이유를 물었다. 순간 지수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지민이 지수의 손을 잡았다. 지민과 지수의 가슴 속에 힘겨운 삶의 생채기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더이상 자매에게 시골 생활이 좋은 이유를 물을 수 없었다.
빗길을 뚫고 산기슭에 자리 잡은 작은 마을 어귀에 도착했다. 가파른 입구를 지나자 널찍한 평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곳엔 지민이와 지수, 동생 동민(10), 할머니, 할아버지가 살고 있는 낡은 시골집이 웅크린 채 자리 잡고 있었다. 알코올성 치매를 앓고 있는 할머니(70)와의 대화는 쉽지 않았다. 할아버지(75) 역시 두 달 전 찾아온 중풍으로 기억이 혼미했다. 노부부는 그러나 아들 내외에 대해서는 명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삼남매가 험한 시골로 들어온 것은 4년 전이다. 감금 생활을 반복하던 아이들을 보다 못한 조부모의 선택이었다. 막내 동민이가 태어나기 한 달 전 심장마비로 남편(48)을 잃은 며느리(42)는 삼남매마저 잃을까봐 두려워했다. 외출할 때마다 아이들을 가두고 자물쇠를 채웠다. 학교에서 연락이 오고 이웃들이 신고를 했지만 달라지지 않았다. 세상과 단절된 아이들은 엄마의 폭행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다. 며느리가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는 사실을 안 노부부는 며느리를 병원으로 옮긴 후 만신창이가 된 아이들을 자신들이 살고 있는 시골로 데리고 왔다.
"동민이 엄마보고 싶어?" 고개를 푹 숙인 채 고개만 가로저었다. 지수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눈빛이 마주치자 눈망울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화제를 돌려 먹고 싶은 것과 갖고 싶은 것을 물었다. 동민이는 피자가 제일 먹고 싶다고 했다. 지수는 참고서가 갖고 싶다고 했다. 지민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병든 조부모와 나이 어린 동생들을 책임져야 하는 지민이는 자신과 가족들이 가질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끝내 얘기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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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미기자 bor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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