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획된 한해의 시간이 막바지에 이를 즈음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반가운 손님이 있습니다. 신년 달력입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새 손님 몇이 찾아왔습니다. 굵은 글씨만 가득 하거나 그림이나 사진뿐이던 옛날과 비교하면 세련되고 앙증맞은 모습입니다. 재질과 기능도 다양합니다. 때에 맞춰 소리도 내고 반짝거리기까지 합니다.
시간에 쫓겨 허겁지겁 살다보니 날짜 챙기기가 쉽지 않습니다. 새 달력이 내방하고 나서야 한 해의 끝에 다다랐음을 압니다. 갑자기 마음이 바빠집니다. 늘 있는 일상들이지만 한차례 매듭을 지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습니다.
모서리가 헤진 2007년도 달력을 펼칩니다. 365개의 시간블록이 빼곡히 찼습니다. 할 일은 빨간색, 한 일은 까만색으로 적었는데 제때 못한 일들이 태반입니다. 12월부터 거꾸로 한 장씩 꼼꼼히 살핍니다. 날짜 마다 흔적이 가득합니다. 별표, 굵은 동그라미, 체크표시 그냥 평이하게 지나간 날이 거의 없습니다. 우왕좌왕 헐레벌떡한 시간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지난 한 해 동안 받았던 명함을 정리합니다. 136개의 명함을 명함철에 새로 꽂았습니다. 만난 이들의 얼굴과 상황이 주마등처럼 스칩니다. 영수증뭉치도 꺼내 하나하나 종류별로 나눕니다. 내가 먹은 것과 자동차가 먹은 것이 대부분입니다. 둘은 엄청난 대식가입니다. oo 칼국수, oo 국밥, oo 반점, oo 산오징어, oo 조개구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한 생활이 한눈에 보입니다. 움직인 동선도 드러납니다. 동대구-서포항간 고속도로 영수증 58개, 주유권 영수증으로 계산해보니 근 10만 킬로를 움직였습니다. 돌이키면 게으르고 모자라는 것뿐인데도 참 바쁘게 산 것 같습니다.
2008년 달력을 펼쳐 2007년 옆에다 뉘입니다. 인수인계를 해야 합니다. 식구들의 생일과 조상님의 기일 그리고 주요 기념일을 적습니다. 또 다른 365개의 시간블록을 설계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질없는 것일 수 있습니다. 오쇼라즈니쉬가 쓴 금강경해석의 내용이 생각납니다. "세존이여, 매일 외출할 때마다 같은 외투를 걸치고, 같은 의대를 매고, 같은 신발을 신으시면서 왜 그리 정성을 다하십니까?" 석가모니가 대답합니다. "너는 내가 오늘 입는 옷을 내일도 입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새 달력은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달력입니다. 그러나 한권의 달력이 일 년치 시간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소유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은 바로 이 순간뿐입니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의 시간'과 '지금의 나'를 가장 사랑합니다.
이정태(경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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