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15년(1623) 발생한 인조반정은 이후 조선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반정 세력들은 조선 멸망 때까지 집권했고, 그 결과 광해군은 최근까지 거의 400여 년을 역사의 음지에서 신음해야 했다. 광해군에 대한 복권이 시도된 것은 최근이었다.
필자를 비롯한 여러 명의 역사학자들이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즉위 후에도 경기도에 대동법을 시범실시하고, 실리외교를 추진하는 등의 정책으로 전란 극복에 일정한 공을 세웠다는 반론을 제기한 것이다. 그러나 인조반정은 광해군이 자초한 측면도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먼저 광해군은 스스로 한 당파의 영수로 자임하면서 고립을 자초했다. 물론 광해군의 입장에서 大北(대북)을 총애한 것은 이해할 만하다. 선조 39년(1606)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가 영창대군을 낳자 영의정 유영경 등이 小北(소북)이 되어 영창대군을 지지해 위기에 빠졌을 때 정인홍 중심의 대북이 광해군을 지지해 어렵게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일단 즉위한 이상 군주는 특정 정파의 이해를 대변해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이런 원칙을 무시하고 대북만의 군주를 자임했다. 광해군 5년(1613) '七庶(칠서)의 獄(옥)'으로 인목대비의 부친 金悌男(김제남)과 영창대군을 제거한 것은 비록 정치공작의 성격이 짙지만 왕권 안정을 위해 불가피한 처사였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인목대비 폐모를 밀어붙인 것은 민생과는 무관한 과거사 집착이자 정치보복일 뿐이었다. 국왕에 대한 충성보다 부모에 대한 효도를 더 높이 평가하던 조선에서 폐모는 패륜으로 몰리게 되어 있었다.
필자가 '교양한국사'에서 인조반정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인목대비 폐모는 효도와 綱常(강상)의 나라, 성리학의 나라 조선의 국시에 대한 도전으로서 왕권을 뛰어넘는 문제였다'라고 평가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광해군도 인목대비에게 원한이 있었지만, 폐모는 대북이 다른 모든 정파를 축출하고 일당독재 체제를 형성하는 결과가 되었다.
서인의 영수였으나 비교적 당파색이 옅었던 이항복은 인목대비 폐비에 반대하다가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어 광해군 10년(1618)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북인과 같은 뿌리였던 남인의 영수 이원익도 홍천으로 유배되었고, 심지어 광해군 즉위에 큰 공을 세웠던 북인 영의정 기자헌까지 홍원에 유배되었다.
조정은 소수 강경파 이이첨 등 극소수 대북이 장악했다. 전 영의정 이항복이 유배가며 지었다는 '철령 높은 봉에 쉬어 넘는 저 구름아/ 孤臣寃淚(고신원루:외로운 신하의 원통한 눈물)를 비 삼아 띄워다가/ 임 계신 九重深處(구중심처)에 뿌려 본들 어떠리'라는 시는 반정 촉구 격문이었다.
인조반정에 서인은 물론 북인들과 뿌리가 같았던 남인들까지 동조했던 것은 광해군이 자초한 것이었다. 광해군이 대북 당수가 아니라 당파를 초월한 국왕의 자리에서 정국을 이끌었다면 인조반정은 발생하지 않았다. 의정부를 각 당파 영수들에게 주고 집행부서인 六曹(육조)를 대북에게 주는 식으로 정국을 운용했다면 서인과 남인들이 쿠데타까지 결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인목대비 폐모 문제로 제1당 서인과 제2당 남인을 축출하고, 북인 일부에게 정권을 모두 주다 보니 다른 당파에 대한 정보가 차단되어 쿠데타 음모를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이니 반정 직후 대북정권에 대한 단죄 분위기가 강했을 것임을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다.
지금 우리 사회도 인조반정 직후처럼 노무현 정권과 그 정치세력에 대한 단죄 분위기가 강한 것이 사실이다. 이 역시 광해군과 대북정권처럼 노무현 정권이 자초한 측면이 큰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반정 정권이 광해군 정권의 모든 것을 부정한 결과 극단적인 친명 사대주의 정책을 채택했고, 병자호란의 비극을 맞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모든 역사는 좋은 역사든 나쁜 역사든 반면교사의 역할을 한다. 집권자가 선호하는 길이 아니라 가기 싫은 길을 선택했을 때 성공한 예가 많은 것도 역사의 교훈이다. 5년 전 노무현 정권이 미래를 지향하라는 역사의 요구를 거부하고 과거로 간 결과가 현재의 모습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5년 후 성공한 정권이라는 평가를 받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미래를 지향해야 한다. 이는 당선자와 그 주변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 한 명 한 명 모두가 선택해야 할 길이기도 하다.
이덕일(역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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