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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훈 칼럼] 집권 세력의 오만과 국민 조롱, 국민이 그렇게 만들었다

정경훈 논설주간
정경훈 논설주간

일본제국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한 후 미군 제1진이 일본에 상륙한 1945년 8월 28일 총리였던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東久邇宮稔彦)는 '일억총참회론'(一億總懺悔論)을 발표했다. 전쟁 책임은 당시 한반도와 대만 등 식민지 주민을 포함해 일본 국민 모두에게 있다는 것으로, 히로히토(裕仁) 덴노(天皇)를 포함해 전쟁을 기획하고 실행한 지배층의 책임을 흐리는 말장난이었다.

이에 대해 1946년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를 시작으로 일본 군국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해 온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는 1956년 발표한 '전쟁책임론의 맹점'에서 이렇게 비판했다. "위급한 상황에 처한 지배층이 그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취한 임시방편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마치 오징어가 도망가기 위해 먹물을 뿜어내는 것과 같다."

그러면 일본 국민은 책임이 없나? 마루야마는 그렇지 않다고 지적한다. 같은 글에서 "지배자와 국민을 구별하자는 말이 틀린 소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국민=피치자'라는 식으로 전쟁 책임을 모든 의미에서 부정하려 들어서는 안 된다… 파시즘 지배에 묵종한 도덕적 책임까지 면제되는가의 여부는 의문으로 남는다"고 했다.('전중과 전후 사이, 1937-1957', 김석근 옮김)

마루야마는 '의문으로 남는다'고 여지(餘地)를 남겼지만 사실(史實)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중일전쟁 때 난징(南京) 함락 후 중국 국민당 정부의 임시 수도 역할을 했던 한커우(漢口)가 일본군에 함락된 1937년 10월 27일 일본 전역이 제등(提燈) 행렬로 불야성을 이뤘다. 침략 전쟁에 열광했던 것이다. 당시 참모본부 고급 과원이었으나 전쟁 확대를 맹렬히 반대해 전선(戰線)에서 제외됐던 호리바 가즈오(堀場一雄) 소좌는 도쿄의 제등 행렬을 보면서 이렇게 기록했다. "한커우 함락으로 국민이 뛸 듯이 기뻐하고, 축하 행렬은 궁성 앞에서 미야케자카에 걸쳐 밤낮으로 충만하다."('쇼와사 1, 1926~1945', 한도 가즈토시〈半藤一利〉)

나치 치하 독일 국민들도 히틀러 독재에 책임이 있다. 히틀러를 합법적으로 집권시켰고 억압 체제 구축에 자발적으로 동조했다. 1939년 말 독일 인구는 8천만 명이었으나 비밀경찰 게슈타포의 수는 7천 명으로, 독일 국민 전체를 감시·통제하기에는 턱없이 적은 규모였다. 그러나 게슈타포는 잘 기능했다. 그 비결은 정치적 목적에 의한 이데올로기적 헌신에서든 개인적 원한·질투·다툼에서든 국민의 밀고와 제보였다. 결론은? 나치 독일은 위에서 질서를 부과하는 경찰국가가 아니라 국민이 감시·통제에 스스로 참여한 '자경(自警) 사회'였다는 것이다.('대중독재 3', 임지현·김용우 역음)

집권 세력이 폭주하고 있다. 국무총리 후보로 지명된 김민석은 소득보다 더 많이 지출하고도 재산이 늘어난 비결에 대한 해명 요구에 문제없었다는 주장으로 일관했다. 야당이 그 주장을 입증할 자료를 내라고 하니 '낼 수 없다'고 했다.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오만을 부리는 것은 대통령이 지명을 철회하지도 않을 것이고, 인준 표결도 압도적 찬성으로 가결될 것으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대통령실이 바보들만 모인 곳이 아니라면 사전 검증에서 문제를 알았을 것이고 대통령에게 보고도 됐을 것이다. 그런데도 총리로 지명한 이유는 무엇일까? 전과자 대통령이 보기에 김민석의 문제는 문제로 보이지 않은 것인가? 아니면 입법·사법·행정 모두 견제 세력이 없으니 총리 자격에 대한 국민의 눈높이쯤은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한 것인가? 어느 것이 됐든 오만이다. 이를 가능케 한 원천은 무엇인가? 전과투성이 대통령을 뽑은 우리 국민의 저열(低劣)한 윤리의식 아닌가.

집권 세력의 오만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여당은 법제사법위원회와 예산결산특별위원회 등 노른자위 국회 상임위를 독식했다. 가증스러운 것은 대통령이 취임 후 여러 차례 '협치'의 신호를 보냈다는 것이다. 대통령의 화법(話法)을 빌리면 '협치한다고 했더니 진짜 협치하려는 줄 알더라'라고 할 수 있겠다. 국민의힘에서 "대통령과 민주당이 우리를 대놓고 조롱한다"는 말이 나온다는데 국민의힘에만 그렇겠나. 지금 집권 세력의 행태는 국민의힘을 넘어 국민 전체에 대한 조롱이다. 그렇게 조롱당하게 된 책임은 국민의 몫이다. 참 처량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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