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장옥관의 시와 함께]항아리/권오택

로봇
mWiz 이 기사 포인트

훨 훨 훨 봄이 지는데

뜰 아래 항아리에 봄이 지는데

靑제비 비를 몰고 몰려왔는가

항아리엔 제절로 고이는 흰 젖

흰 젖에 훨 훨 훨 봄이 지는데

몇 백 년 오랜 꿈도

항아리 속엔

고요히 잠들어서 차지 않았네

항아리엔 반 쯤

하늘의 흰 젖

그 위에 꽃무늬로 꿈이 지는데

'봄이 지는데' - '봄이 지는데' - '꿈이 지는데'로 이어지는 병렬구문이 환기하는 탄식의 정조. 찬란한 개화 뒤에는 허망한 소멸의 순간이 잇대오는 법. 한바탕 봄꿈처럼 온 세상을 환하게 밝히던 꽃들은 '훨 훨 훨' 떨어지고, 때마침 내리는 봄비는 날리는 꽃잎 때문에 흰 젖이 되고 마는구나. 흰 젖은 뜰 아래 항아리에 가만히 고이는데, 그걸 바라보는 젖은 시선.

훨 훨 훨의 'ㅎ'과 항아리의 'ㅎ'과 흰 젖의 'ㅎ'과 하늘의 'ㅎ'이 겹쳐 빚어내는 유현한 공간. 못다 채운 항아리의 꿈을 안고 시인은 이미 오래 전에 그 공간으로 돌아가시고, 이 서럽고 아름다운 시편만 여기에 남아 봄밤을 밝히는구나. 사십 년 전에는 시를 쓰시는 줄 전혀 몰랐던 영어 선생님. 그 시절 까까머리 중학생 기억이 새삼 떠올리는 그 선한 덧니.

시인

최신 기사

mWiz
1800
AI 뉴스브리핑
정치 경제 사회
19일 발표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재명 대통령의 지지율은 55%로 직전 조사 대비 1% 하락했으며, 부정 평가는 36%로 2% 증가했다. 긍정적...
금과 은 관련 상장지수상품(ETP) 수익률이 미국 연준의 기준금리 인하 기대감과 실물시장 공급 부족으로 급등하며, 국내 'KODEX 은선물 ET...
방송인 박나래와 관련된 '주사이모' 불법 의료행위 논란이 확산되며, 유튜버 입짧은햇님이 직접 시인하고 활동 중단을 선언했다. 입짧은햇님은 '주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