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12년 키워준 우순필씨를 찾습니다" 가즈토의 사모곡

'울타리에 노랗게 폈던 개나리, 하얗고 빨갛게 채색하던 진달래, 팔공산을 곱게 물들이던 단풍, 아~ 어머니의 나라···.'

1990년 6월 10일 히로하따 가즈또씨는 63세의 나이로 일본 후쿠오카의 어느 병원에서 숨졌다. 위암이었다. 그의 머리맡에는 한국에서 만난 어머니의 사진과 '비 내리는 고모령'이 수록된 노래책이 놓여있었다.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엔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소'라는 구절 곳곳에는 눈물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

히로하따 가즈또. 한국 이름은 이재건(李在建)이었다. 그는 1940년 일제강점기에 가족들과 한국으로 들어왔다. 1945년 석공인 아버지가 함경남도 함흥으로 건축공사를 위해 가족들과 떠났다. 중학교 전학 수속이 끝나는 대로 뒤따르려던 그는 그해 8월 일본의 항복으로 38선이 갈리는 통에 혼자가 됐다.

그때부터 식당에서 손님들이 먹다 남긴 밥으로 끼니를 때웠고 헌옷을 얻어 입었다. 민가의 헛간이나 외양간을 떠돌며 새벽이슬을 피하던 그는 영양부족과 오한에 시달리다 결국 정신을 잃었다. 깨어나보니 그는 우순필(禹順必)이라는 이름을 쓰는 한 아주머니댁 안방에 누워있었다.

당시 대구 무태에 살고 있던 우씨는 가즈또의 딱한 사정을 듣고 혀를 찼다.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양자로 삼겠다며 친아들의 항렬을 따 '이재건'이란 이름을 지어줬다. 가즈또는 우씨의 도움으로 학교를 다시 다녔고, 일본으로 계속 편지를 보낼 수 있었다. 친형제 같은 4형제들의 도움으로 한국어도 쉽게 배웠다. 그렇게 12년간 한국 생활을 하다 마침내 1957년 3월 일본의 가족과 연락이 닿아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기적이었다.

"내게는 한국과 일본이라는 두 조국이 있습니다. 낳아 준 일본 어머니와 길러준 한국 어머니가 있습니다. 우순필 어머니를 찾고 싶습니다." 죽기 직전 그는 이런 유언을 남겼다.

'우순필씨와 그 가족들을 찾습니다.'

일본 후쿠오카 한 대학에서 교수로 있던 신현하(81)씨는 1980년대 후반 우연히 히로하따 가즈또씨를 만났다. 한국인에게 유난히 친절하던 가즈또씨로부터 한국 생활과 우순필 어머니, 다른 가족들의 사연을 들으며 함께 눈시울을 붉혔다.

대구수창초등학교, 대구사범학교 심상과 동창생인 사실을 알고 서로 손뼉을 치기도 했다. 그때까지 가즈또씨는 1년에 한두 차례씩 한국을 오가며 인연을 이어오고 있었지만 위암으로 투병생활을 시작하면서 연락이 끊겨 버렸다.

신씨는 이 이야기를 일본 후쿠오카의 한 방송국 친구에게 전했고, 다큐멘터리로 제작하려 하고 있으나 한국 가족들의 행방을 찾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가즈또씨의 가족들도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우순필씨의 생사 여부와 4형제의 소식을 전혀 알 수 없다고 한다.

현재 경기도에 살고 있는 신씨는 일본의 "방송국에서 사진을 모두 가져가 버려 참으로 어렵겠지만 가즈또씨가 남긴 감사의 마음을 꼭 전하고 싶다"며 본사에 도움을 청해왔다.

서상현기자 ssa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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