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우유 배달부의 딸 테스는 미모가 출중했다. 어느 날, 주정뱅이 아버지는 자신의 성(姓) 더버빌즈가 꽤 이름난 귀족의 성임을 알게 된다. 비록 지금 남루한 몰골이지만 자신이 귀족 가문의 자손이라는 것이다. 허황한 생각에 젖은 그는 더버빌즈라는 성을 쓰는 먼 친척집에 딸 테스를 보내 일하게 한다.
친척집 아들 알렉은 한눈에 테스에게 반해 기회를 노린다. 테스는 알렉을 경계하지만 결국 처녀성을 잃는다.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의 아이를 낳고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아이는 곧 죽고 만다. 아이를 묻고 테스는 새 출발하기 위해 낙농장으로 떠난다. 거기서 젖 짜는 일을 하면서 엔젤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엔젤과 테스는 열렬히 사랑했고 결혼하기로 했다. 그러나 테스는 자신의 과거 때문에 망설인다. 그녀는 망설임 끝에 자신의 과거를 편지로 써서 엔젤의 방문 틈으로 밀어 넣는다. 엔젤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문틈 아래로 밀어 넣은 편지가 카펫 아래로 들어가는 바람에 엔젤은 못 봤던 것이다. 그렇게 엔젤의 답을 기다리는 사이 시간이 흘렀고 테스는 엔젤이 자기 편지를 읽지 못했음을 알았지만 결혼했다.
첫날 밤 엔젤은 동거했던 여자가 있었다고 자신의 과거를 고백한다. 테스는 기꺼이 남편의 과거를 용서한다. 오히려 기쁠 지경이었다. 남편의 고백에 용기를 얻은 테스는 자신이 알렉에게 겪은 수모를 고백한다. 그러나 엔젤은 테스의 과거를 받아들이지 못한다.(역사·문학적으로 이 부분은 당시 영국의 인습적 한계로 주목받는다.)
엔젤은 테스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브라질로 떠난다. 테스는 몇 번 편지를 쓰지만 엔젤에게 도착하지 않는다. 집안의 경제적 어려움, 아버지의 죽음, 외로움과 고통에 시달리던 테스는 우연히 다시 알렉을 만나 동거한다.
알렉은 자신의 과거 잘못을 회개하는 마음으로 성직자의 길을 걷고 있었지만 길에서 다시 테스를 보는 순간 욕정에 휩싸이고 만다. 그는 가볍게 성직자의 길을 걷어치우고 테스를 취했다.
브라질에서 몇 년을 보낸 후 엔젤은 종교적 편견과 사회적 인습을 극복한다. 그는 테스를 찾아와 자신의 잘못과 사랑을 고백한다. 격정에 사무친 테스는 자신의 일생을 망친 알렉을 살해하고 엔젤과 함께 도망친다. 그러나 곧 잡혀 처형당한다.
이 불행한 여인의 이야기는 흔히 '운명의 힘'에 관한 사례로 소개된다. 술에 취해 일어나지 못하는 아버지 대신 새벽 배달을 나서면서 테스는 '자신의 운명이 썩은 사과 같다'고 말하곤 했다. 그리고 그녀의 운명은 불행하게 펼쳐졌다. 그래서 이 소설은 '성격이 곧 운명이다'는 말이 나오게 했다.
이 소설은 출간 당시 영국의 인습적 한계와 남녀 불평등을 고발하는 작품으로 널리 읽혔다. 그러나 요즘처럼 '프리'한 사회에서는 '시간의 속성'에 비추어 읽는 편이 더 흥미로울 수 있다.
브라질에서 몇 년을 보내는 동안 성장한 엔젤은 자신이 진정 테스를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고 돌아온다. 그러나 이제는 시간이 자기편이 아니다. 엔젤이 인간적으로 성장하는 동안 테스는 현실적 고통을 이기지 못해 자신을 망친 과거로 돌아가, 거기 발을 담갔던 것이다.
시간은 돌이킬 수 없다는 점에서 치명적인 덫이다. 빠져 나올 수 없는 덫에 걸린 테스는 결국 현실을 파괴하는 방법을 선택한다. 알렉을 살해한 것이다. 알렉을 살해함으로써 그녀가 얻은 것은 찰나의 행복이었다. 그녀가 알렉을 살해한 대가로 처형대에 오를 때 엔젤은 그녀의 여동생 리자루의 손을 잡고 있었다.(손을 잡았다는 표현을 새로운 '연애의 시작'으로 보는 것은 오역일 수 있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는 근본적으로 나쁘지도 좋지도 않다. 어떤 한 인간이 존재 그 자체로 다른 인간을 파멸하는 경우는 드물다. 다만 두 사람이 관계를 맺는 시기와 거리에 따라 행·불행이 잉태한다.
많은 남녀관계가 거리와 시간을 지키지 못해 불행으로 치닫는다. 알렉과 테스의 불행은 잘못된 거리에서 비롯됐다. 알렉은 가까워지기를 바랐지만 테스는 가까워지고 싶지 않았다. 엔젤과 테스의 관계는 어긋난 시간에서 비롯한다. 처음 두 사람이 만나 사랑할 때 엔젤은 미숙한 남자였고, 원숙한 남자가 돼 돌아왔을 때는 시간이 너무 지난 후였다. 아무리 선하고 아름다운 관계일지라도 적절한 시간에 맞추지 못하면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모양이다.
테스와 엔젤의 사랑은 현실에서 실패했지만 낭만이라는 점에서 성공했다. 이루어지지 못한 많은 사랑이 낭만의 색깔을 띠는 것은 시간 조절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시간과 거리조절에 성공한 사랑은 대체로 칙칙한 '생활의 색깔'을 띤다. 부부간의 색깔이 좋은 예다. 칙칙한 생활의 색을 벗겨내고 낭만을 채색하고 싶다면 파멸을 감내해야 할지도 모른다. 시간이라는 자물쇠를 푸는 열쇠는 없고, 그 족쇄를 푸는 것은 정과 망치임을 테스는 잘 보여준다.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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