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나무새'라는 노래는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라는 가사를 가지고 있다. 내 속의 헛된 바람이 당신의 쉴 자리를 뺏는 것 같아 안타깝다는 노랫말이다. 그런데 언제 부턴가 이 노래만 들으면 섬뜩함을 느낀다.
내 속에 나 아닌 다른 뭔가가 들어 있다는 것. 제어할 수 없고, 삭제할 수도 없는 또 다른 나. '나'이지만 나의 통제를 받지 않는 '그 놈'이 무슨 짓을 저지를까, 생각만 해도 공포스러운 일이다.
스릴러의 거장 알프레드 히이콕(1899~1980)의 '사이코'는 이중인격을 소재로 한 영화다. 내 속의 인격이 둘이 있는 것이다.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또 다른 내가 참혹한 살인을 저지른다.
베이츠 모텔의 주인인 노만. 말쑥하고 친절한 청년이다. 병이 든 노모를 끔찍이 간호하며 혼자 살아간다. 어느 날 금발 미녀인 마리온이 찾아온다. 1호실을 주고 함께 이야기도 나눈다.
신 고속도로가 나는 바람에 옛길이 된 도로에는 차들이 듬성 등성 지나간다. 마리온도 길을 잘못 들어 베이츠모텔에 왔다. 스산하고 음산한 밤. 마리온은 샤워를 하기 위해 옷을 벗는다. 그런데 이를 은밀하게 쳐다보는 눈이 있다. 노만이 옆방으로 난 구멍으로 그녀의 몸을 훑어본다.
샤워 줄기로 시원한 물이 쏟아진다. 그러나 곧 샤워실 비닐막이 걷히면서 하얀 칼날이 그녀의 몸을 난자한다.
'싸이코'의 노만은 가해자이면서 희생자이다. 그는 요즘으로 치면 지독한 마더 콤플렉스(어머니를 이상형의 여인으로 믿고 의지하는 유형)에 사로잡힌 마마보이다.
10년 전 어머니와 그 애인을 살해한 것은 어머니에 대한 배신감과 박탈감 때문이었다. 그래도 그는 어머니의 품을 벗어나지 못한다. 혹독하면서도 독재자였던 어머니는 그의 모든 세계였다. 그래서 어머니를 박제로 만들어 함께 생활한다. 평상시처럼 얘기하고, 꾸중도 듣다가 어느덧 노만의 자아는 사라지고 어머니의 자아가 그 자리에 들어선다.
둘의 관계가 깨어질 때가 매혹적인 여성이 나타날 때다. 젊은 노만은 당연히 젊은 여성에게 관능과 섹스를 느낀다. 그러면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이 밀려오고, 이를 견딜 수 없어 내면의 어머니가 살아나 그 여인을 살해한다.
알프레드 히치콕은 '싸이코'를 비롯해 '새', '현기증', '레베카' 등 영화에서 백인 금발의 여성을 등장시켜 곤욕을 치르게 하는 '악취미(?)'를 가지고 있다. 잉글리드 버그만, 킴 노박 등 당대 최고의 여배우들이 그 희생자들이었다. 특히 돈을 횡령하는 '싸이코'의 마리온처럼 예쁘면서 악행을 저지르는 여성에게는 가차 없었다.
샤워 살해 장면은 영화사상 가장 완벽한 편집의 하나로 손꼽힌다. 겨우 45초에 불과하지만 카메라의 위치를 70차례나 바꾸고 7일 동안 촬영했다. 여체의 은밀한 부분을 전혀 보여주지 않고도 잔인성과 에로티시즘을 표현하고 있는데, 흑백영화이면서도 선연한 피의 강렬한 이미지가 욕조 밖으로 튀어나올 듯 느껴진다.
영화가 개봉한 후 샤워를 하지 않으려는 여성들이 줄을 이었다는 후문도 있을 정도로 섬뜩하다.
화가 권기철이 주목한 것도 이 장면이다. 나신의 여인을 난자하는 검은 사내를 전면에 배치했다. 붉은 칼을 들고 욕실에 난입해 피를 뿌리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눈이다. 왼쪽 눈에 마리온이 죽은 후 클로즈업되는 눈을 붙여놓았다. 사무실벽 구멍으로 마리온의 여체를 훔쳐보는 노만의 성욕에 대한 간절함일까.
작품 하단 알파벳은 마리온이 타고 온 차 넘버다. 차는 마리온의 시체와 4만 달러를 싣고 늪 속에 잠긴다.
시인 노태맹은 노만의 내면이 갇힌 검은 방을 묘사하고 있다. 어머니에게서 빠져나오지 못한 가련한 한 남자가 내부와 외부의 구분도 없고, 날아오를 수도 없는 텅 빈 방에 갇혀 있는 모습이다.
무더운 여름 날. '싸이코'는 대구의 더위를 쫓기에 더 없이 좋은 스릴러영화다. 하긴 술 먹은 후 필름이 끊긴 나를 보며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라는 사실을 경험한 이들은 현실이 더 공포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 싸이코(Psycho 1960)
감독:알프레드 히치콕
출연:앤서니 퍼킨스, 자넷 리, 베라 마일즈
상영시간:109분
줄거리:마리온(자넷 리)은 애인 샘과 결혼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샘은 빚을 갚을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한다. 그녀는 사무실에서 입금하라고 맡긴 돈 4만 달러를 들고 도망친다. 도주 첫날 밤. 도로변의 으스스한 낡은 모텔에 들어간다. 모텔 뒤로는 빅토리아풍의 저택이 자리 잡고 있다. 모텔 주인 노만(앤서니 퍼킨스)은 거기에 몸이 불편한 어머니가 살고 있다고 말한다. 노만의 은밀한 시선을 피해 샤워를 하던 그녀는 정체모를 괴한에 의해 욕조에서 잔인하게 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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