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발칙+명랑 '제대로 된 B급'…영화 '플래닛 테러'

B급은 느긋하다.

A급의 고상함도 필요 없고, 애초에 저예산으로 출발했으니 줄거리나 화면이 매끈하거나 깔끔할 필요도 없다. 기존의 룰이나, 틀에 얽매이지도 않는다. 자유를 만끽하면서 만드는 영화가 바로 B급 영화다.

그래서 혹자는 "B급 영화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영화가 아닐까?"라고 말한다.

로버트 로드리게스 감독의 '플래닛 테러'는 B급영화의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은 영화다. 싸구려 B급을 표방하지만, 만듦새는 A급이다.

이 영화는 할리우드의 악동 쿠엔틴 타란티노와 로드리게스 감독이 두편의 영화와 네편의 가짜 예고편을 중간에 넣어 묶은 3시간이 넘는 엽기 호러물 '그라인드 하우스' 중 한편이다. 타란티노의 작품은 지난해 '데쓰 프루프'라는 제목으로 국내 개봉됐다.

B급영화는 할리우드 키드들에게 공통된 향수다. 팀 버튼은 1950년대 괴짜 감독 에드워드 D. 우드 주니어를 그린 '에드우드'(1994년)를 감독하기도 했다. 그는 쟁반으로 외계 비행선을 만들고, 괴물이 문에 부딪치는 등 엉성하기 짝이 없는 영화들을 3일 만에 한편 뚝딱 만들어낸 기괴한 인물이다.

그러나 타란티노와 로드리게스는 내용뿐 아니라 형식까지 B급영화의 맛을 재생시켰다. '데쓰 프루프'가 개봉될 때 영화 중간에 초점이 흐려지고, 필름이 타는 것 같은 의도된 화면효과 때문에 한국 관객들이 당혹스러워했다.

'플래닛 테러'에서도 끊임없이 '비'(긁힌 자국)가 내리고, 포커스가 나가고, 화면이 끊겼다가 심지어 '미안하다'는 자막까지 나온다. 예전 동시상영관에서 B급영화를 즐겼던 이들에게는 향수 어린 '사고'들이다.

줄거리도 예전 B급영화들이 천착했던 좀비 호러의 전형을 그대로 따른다.

텍사스의 시골 마을. 에로틱 댄서 체리 달링(로즈 맥고완)은 남성들의 끈적한 눈길 속에서 춤추는 것에 환멸을 느끼고 마을을 떠나 스탠딩 코미디언으로 업종을 바꾸려고 한다. 그녀의 연인 엘레이(프레디 로드리게스)는 대형 트럭에 총기를 싣고 다니며 무술에도 능한 인물이다.

엘레이의 트럭을 타고 마을을 벗어나려는 그녀는 도로변에서 좀비들의 습격을 받는다. 겨우 목숨을 건지지만 한쪽 다리를 잃는다. 평화롭던 한 마을에 정체불명의 DC-2 바이러스가 무차별 살포되면서 마을 주민들은 엄청난 속도로 감염된다. 좀비들은 땀구멍이 부풀어 온몸이 고름투성이다.

감염되지 않은 소수의 주민들과 여전사로 거듭나는 체리 달링은 이 바이러스에 대항하기 위한 정예팀을 발족한다. 체리 달링은 한쪽 다리에 머신건을 장착하고 좀비의 섬멸에 나선다.

이 영화를 볼 때는 몇가지 정신 무장이 필요하다. 우선 필름 '사고'를 즐겨라. 국내 개봉에는 '다음에 이어질 예고편과 본 영화 속 화질변환, 중복편집, 음향사고 등은 모두 감독에 의해 의도된 것'이라는 자막까지 넣었다.

또 끔찍하고 지저분하고, 유치한 것에 너그러워져야(?) 한다. 피 고름이 쿨럭쿨럭 쏟아져 나오고, 좀비들이 팔 다리를 뜯어 입속에 넣는 장면이 이어진다. 이번 개봉판은 원판에서 15분이 추가된 인터내셔널 버전이다. 피비린내가 진동하지만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를 무사히 통과했다.

또 하나는 로드리게스의 농담과 유머를 즐겨야 한다는 것이다. 총알을 장전한 다리로 하늘을 뛰어오르거나, 에로틱한 포즈로 포탄을 피하고, 죽을 위험에 처해 있으면서도 사랑을 고백하고, 피를 맛본 식당 주인이 "기가 막힌 소스다!"는 장면 등에서 웃어주는 센스가 필요하다.

'플래닛 테러'는 영화보기의 고정관념에 테러를 가하는, B급영화의 향수를 잘 살린 매력적인 영화다. 장난기와 재치, 쾌도난마의 자유정신은 그 어떤 A급영화보다 재미를 더해준다.

금방 사귄 여인들이나, 점잖은 어른들을 모시고 이 영화를 보는 '우'는 범하지 않기를…. 105분. 18세 관람가.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 B급 영화란?

A급 영화와 동시에 상영되는 싸구려 영화다. 적은 제작비에 등장하는 배우도 지명도가 낮고, 감독도 1급이 아니었다. 공황기인 1930년대 미국 영화산업이 도입한 영화마케팅의 한 방법에서 유래한 말. 당시는 영화흥행을 위해 두편의 영화를 한편 값으로 동시 상영했다. 주 상영작품을 A급 영화, 질이 낮은 두번째 영화를 B급 영화라고 불렀다.

1950년대는 공상과학영화가, 60년대에는 모터사이클 영화들이, 그리고 70년대의 흑인개척영화와 마약에 관한 영화들이 이에 포함된다.

거대 자본의 대작이나 제도화된 예술영화들과 달리 B급 영화는 영화에 대한 순수한 흥분과 열정에 의해 창조됐다. 상업적인 목적의 대작보다는 감독의 순수한 손길에서 만들어져 상상력의 산물이고 꿈의 발현이라는 영화 원래의 의미에 부합해 많은 관심을 끌었다.

조지 로메로 감독의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1968년)과 같은 경우 미국 영문학에서 훌륭한 텍스트로 연구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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