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9월 미국 서부를 갔습니다. 백인에 의해 몰살된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피가 스민 듯이 붉디붉은 바위산 위에 앉아, 광활한 대지가 전해주는 이야기를 들으려 했습니다. 거친 호흡을 추스르고 영겁의 의미에 침잠하라고 바람은 속삭였습니다. 자연이 주는 감동은 그리움으로 남았습니다. 더 좋았던 것은 아들과 함께였던 거였습니다. 어리지만 감동을 교감하고 공유하는 데 부족함 없는 동반자였습니다. 혼자였다면 정말 시들한 여행이었을 겁니다. 한 철학적 가설이 떠오릅니다. 창조주는 우주를 빚어내고 문득 외로워집니다. '혼자 보기에 너무 아깝군.' 신은 자신과 자신의 작품을 알아줄 존재의 필요성을 느낍니다. 생명은 그렇게 해서 태어납니다.
신이 고독할 거라는 장광설을 풀어놓는 것은 오늘날 한국에서 일어나는 종교적 가치관의 혼란 양상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촛불집회 같은 사회현상을 놓고 도저히 같은 신을 믿는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의 극단적 대립과 증오, 주장의 충돌이 벌어집니다.
탐욕에 찌든 종교 지도자들에게 현존하는 신 또는 그 대리인은 껄끄러운 존재입니다. 세계의 주요 종교들이 발상지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했으며, 동서고금의 적지 않은 성자(聖者)들이 권력층에 의해 핍박과 죽임을 당한 데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2천년 전 예루살렘에서 가난한 이들을 사랑으로 보듬으며 만민평등을 외친 예수 역시 당시 권세가들에겐 기득권을 위협하는 존재였습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매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성자는 죽어야 숭배의 대상이 됩니다. 사람들은 '죽은 신'을 사원과 교회에 모시고 신을 통해 권력과 부귀영화를 얻어내고자 합니다. 신은 세속의 시시콜콜한 욕망의 해결사 노릇을 종용받고, 신의 메시지는 기득권과 권력을 지탱하는 이념으로 왜곡됩니다. god를 거꾸로 읽으면 dog가 됩니다. 입으로는 god을 외치면서도 속으로는 철자를 거꾸로 읽는 거 아닌지 모를 일입니다. 촛불집회 현장에서 누군가가 '꽃으로도 사람을 때리지 말라'는 팻말을 든 모습을 TV로 보았습니다. 비폭력의 위대함을 이토록 아름답게 표현한 말이 또 있을까요. 여기에 '돌보다 꽃으로 맞는 게 더 아프다'는 이야기가 있어 소개합니다.
중세 중동지방에 만수르라는 수피(이슬람 신비주의) 성자가 살았습니다. 만수르는 "아날 하크"(Ana'l haq·나는 신이다)라고 외치고 다녔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신성과 다르지 않다는 은유였지요. 그러나 회교도들은 이를 신성모독으로 받아들입니다. 분노한 군중들은 만수르를 돌로 쳐서 처형합니다. 죽어가면서도 만수르는 웃습니다. "왜 웃냐?"는 물음에 그는 "그대들은 오로지 육체를 죽일 뿐 내 안의 신성을 죽일 수 없다"고 답합니다. 군중 속엔 만수르의 스승도 있었습니다. 그는 명성이 높았지만 깨닫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주변 시선을 의식한 나머지 차마 돌을 던지지 못하고 장미꽃을 던졌습니다. 죽어가면서도 웃던 만수르였지만 스승이 던진 장미꽃에 맞자 슬프게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오늘날 예수가 재림해 우리 앞에 나타난다고 해도 돌을 맞고 십자가에 다시 매달리지 않을 거라고 누가 보장할 수 있을까요. 21세기 한국을 바라보는 신은 고독을 느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김해용 기획취재부장 kimh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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