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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턴 우즈 체제'로 시작된 달러 패권주의의 역사

1944년 2차 대전 연합국 44개국 대표가 미국 뉴햄프셔주 브레턴 우즈에 모였다. 이른바 '브레턴 우즈 체제'로 불리는 합의에서 미국 달러화만이 금을 기준으로 가치가 결정(금 1온스당 35달러)되고 다른 나라 통화가치는 달러화에 고정시키는 '금·달러 본위제'가 시작됐다. 전쟁 피해도 거의 없었고, 전 세계 금과 외화가치의 70%를 거머쥔 미국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을 치르며 막대한 돈이 들어갔고, 독일과 일본 상품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미국 달러는 이들 나라로 흘러들어갔다. 외국이 보유한 막대한 달러를 갑자기 금으로 바꿔달라고 하는 순간 미국은 곤란한 지경에 빠진다. 실제로 1971년 8월 초 프랑스와 영국이 보유 달러를 금으로 바꿔갈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달러화 투매가 일었다. 결국 닉슨 대통령은 더 이상 달러를 금으로 바꿔주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달러가 자칫 휴지조각이 될 수 있었지만 미국은 금 대신 석유를 택했다. 당시 산유국들도 달러 외에는 달리 선택할 국제통화가 없었기에 달러로만 원유 수출대금을 받기로 1973년 합의했다. 이 때부터 각국 통화가치는 달러에 대비해 움직였고, 실질적인 '달러 본위제'가 시작됐다.

하지만 달러는 불안했다. 미국 경제는 1970년대 두 차례 오일쇼크와 1980년대 전반 레이건 정부의 대폭적인 감세 및 국방비 지출 확대 등 느슨한 재정운용으로 인플레이션율이 급등하게 됐다. 미국 정부가 돈 풀기를 멈추면서 달러 구하기가 힘들어졌다. 달러 가치가 오르자 미국 내 생산제품의 원가가 상승했고 무역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었다. 번번이 밑지는 장사를 하던 미국이 갑자기 수출 길을 막아버리면 큰 일이라고 생각한 주요 선진국들은 대책회의를 열었다. 1985년 9월 뉴욕 플라자호텔에서 G5(미국·일본·영국·프랑스·독일)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들이 모여 달러 가치를 낮추자고 결의, 즉 '플라자 합의'를 이끌어 낸다. 이후에도 미국은 달러 가치의 지나친 하락을 우려해 '루브르 합의'를 이끌어내는 등 막강 파워를 과시했지만 현상황에서도 이런 힘이 적용될지는 의문이다.

김수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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