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의 實學(실학)사상은 18세기 말~19세기 초 암울했던 조선의 앞날을 밝히려는 '한줄기 빛'이었다. 그러나 오랜 귀양살이와 政敵(정적)들의 농간에 막혀 그의 정신이 크게 빛을 보지 못한 것은 역사적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다산은 엄청난 양의 실학 저술을 남겼으나 그가 더욱 인간적인 면모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무려 18년 동안의 귀양살이 때문인지도 모른다.
외부 활동이 금지된 강진에서의 유배생활 동안 그가 가족과 벗, 제자들과 접촉할 수 있는 길은 서한뿐 이었다. 다산의 편지는 그래서 우리에게 더욱 애절한 호소력을 갖는다. 다산이 1808년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詩(시)에 대한 그의 철학이 시퍼렇게 녹아있다.
"임금을 사랑하지 않고 나라를 근심하지 않는 시는 시가 아니다.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에 분개하지 않는 시는 시가 아니다. 착한 것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하는 뜻이 담겨져 있지 않은 시는 시가 아니다. 뜻이 세워져 있지 못한데다 학문은 설익고, 삶의 大道(대도)를 아직 배우지 못한 사람은 시를 지을 수가 없는 것이니 너도 그 점에 힘써라"고 일갈했다. 이처럼 다산의 편지에는 시대를 아파하면서 당시 서민들의 처참한 생활상을 그린 인간적인 시들이 너무나 많다.
다산은 자신을 아껴주었던 正祖(정조) 사후에는 평생을 정쟁에 휘말려 살았기 때문에 몸가짐에 특히 조심했다. 그의 아호이자 고향집 당호인 與猶堂(여유당)도 노자의 '망설이면서(與) 겨울에 냇물을 건너는 것 같이, 주저하면서(猶)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한다'에서 따온 것을 보면 그가 어떻게 처신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는 죽기 전 장례절차까지 몸소 챙겼다. "집의 동산에 매장하고 석물을 지나치게 세우지 말라"고 유언했다.
최근 다산의 '마지막 친필 편지' 등 다산 편지 29통이 그의 제자 집안에서 한꺼번에 발견됐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마지막 편지는 애제자 황상에게 보낸 것으로 "내 부고를 듣는 날 오지 말고 산중에서 한차례 울고 지난 일을 얘기하며 다른 제자들과 함께 그치도록 하라"는 내용이다. 선생의 제자 사랑이 흠뻑 느껴지는 편지다.
나라를 부유하게 만들겠다는 실학정신과 시대를 아파하는 다산의 개혁정신은 지금도 우리의 민족혼을 흔들어 깨우는 거대한 사자후로 들린다.
윤주태 논설위원 yzoote@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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