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장옥관의 시와 함께] 가을 포도밭/김기연

이젠, 다 주었구나

황갈색 늑골

듬 · 성 · 듬 · 성

남은 늦포도

아름다운 주검으로 매달렸구나

핏빛 그리움 캄캄히 저무는구나

속옷 갈아입을 때 훔쳐보았지. 낡은 '런닝구' 속으로 들여다보이는 늦포도 두 알. 바람 빠진 풍선처럼 축 쳐진 젖무덤 위로 가까스로 매달려 있는 건포도 두 알. 탱탱하게 부풀어 오른 과즙의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 포도알. 온 동네를 다 먹여 살리던 찬 샘물처럼 먹어도 먹어도 그치지 않던 희디흰 젖.

수확하고 난 과수처럼 쓸쓸한 게 또 있을까. 신열 앓던 봄 시절 지나, 불볕 땡볕 견디어 맺은 결실을 다 내어주고 캄캄히 저무는 가을 나무들. 꼭지만 남은 감나무의 가지는 몸비듬 더께 앉은 노인의 여윈 팔다리를 닮았다. 늦가을 포도밭처럼 듬성듬성한 시행, 명절이랍시고 얼굴 삐끔 보여주고 달아나던 내 모습이 거기 숨어있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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