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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춘추] 달·포도·잎사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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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입구에 보현산 포도라며 한 차 싣고 와 팔기에 큰마음 먹고 한 상자를 샀다. 지난달 영천 보현산 천문대에서 별빛 축제가 있다기에 가다가 만난 포도밭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다.

길 따라 이어진 포도밭에는 주렁주렁 잎사귀 뒤에 숭어리를 숨긴 포도가 알알이 영글고 있었다. 어느 곳보다 맑고 깨끗한 바람과 공기를 쐬며 낮에는 투명한 햇살을, 밤에는 하늘의 별과 달빛을 머금고 익었으리라. 포도 한 알 한 알마다 새벽이슬에 풀벌레 소리를 담가 단맛을 우려우려 내었으리라.

포도알을 따 먹으며 나는 그 향기롭고 달착지근한 고향의 맛과 향에 취한다. 시인 장만영은 포도를 '달빛을 머금고 익는다'고 노래하였다.

순이, 벌레 우는 고풍한 뜰에/ 달빛이 밀물처럼 밀려왔구나.// 달은 나의 뜰에 고요히 앉아 있다./ 달은 과일보다 향그럽다.// 동해 바다 물처럼/ 푸른/ 가을/ 밤// 포도는 달빛이 스며 고웁다./ 포도는 달빛을 머금고 익는다.// 순이, 포도넝쿨 밑에 어린 잎새들이/ 달빛에 젖어 호젓하구나. -장만영, '달·포도·잎사귀' 전문

신비스러울 정도로 아름답고 서늘한 푸른 서정의 분위기가 넘쳐나고 있다. 한 폭의 그림 같은 시이다. 가을이 오는 밤, 달이 비치는 뜰의 모습이 너무도 선명하다. 소리와 색깔과 향기가 포도송이 속에서 금방 톡톡 튀어 나올 듯하다.

포도를 먹으면서 나는 시 속의 정취에 젖어 본다. 시 속에는 벌레가 울고 밀물처럼 달빛이 밀려 온다. 포도는 향기롭고 그윽한 달빛을 머금고 익고 있다. 소꿉친구 순이도 이 달을 보고 있을까.

그러나 애틋하다. 달을 모르고 살아가는 도시인의 삶이. 도시인들은 달을 잊고 산 지 오래다. 가로등, 조명등에 길든 사람들은 그것이 달인 줄 알고 산다. 인위적인 조명에 길든 인간은 달의 존재조차 망각하고 있으리라. 순이도 어쩌면 달을 잊고 살지 모른다. 인간이 외면해도 달은 만유(萬有)를 위해 제 일을 다 한다. 태양이 못다 한 일을 달은 밤새도록 소임을 다 하는 것이다. 달빛을 머금은 포도는 그래서 무르익어 감미가 충만하리라.

우리는 달디단 달빛을 찾아야겠다. 달이 우리에게 주는 풍성한 결실을 위해서…….

달을 잊지 않은 옛날의 순이와 함께 포도넝쿨 밑 어린 잎새를 보며 호젓이 달빛에 젖었으면 좋겠다. 그리하면 내 몸도 과일처럼 향그러워질까.

공영구 (시인·경신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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