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사필귀정] '燈火可親(등화가친)'의 계절?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뛰어난 문인이었던 李德懋(이덕무,1741~1793)는 지독한 책벌레였다. 그가 쓴 '看書痴傳(간서치전)'에는 책에 미쳐 산 젊은 날의 자화상을 담고 있다. 어느 정도였나 하면 풍열로 눈병에 걸려 눈을 뜰 수 없는 상황에서도 어렵사리 실눈을 뜨고 책을 읽었다. 너무 가난해서 책 살 돈이 없었던 그는 늘 지인들로부터 빌려 읽었는데 열 손가락이 동상으로 퉁퉁 부은 지경에서도 책 빌려달라는 편지를 써보냈다. 빈한한 살림살이에도 오로지 책 읽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겨 춥거나 덥거나 주리거나 병들거나 전연 알지 못했다니 스스로도 말했듯 책에 미친 바보라 할만하다.

일본의 다치바나 다카시(立花隆, 1940~)는 저널리스트 출신의 저명한 저술가이다. 그의 관심 분야는 사회문제에서부터 뇌과학 등 과학에서부터 예술,우주, 종교,심지어 뇌사, 임사체험,원숭이학 등 벼라별 분야로 종횡무진 뻗치고 있다. 그것도 놀랄만한 전문 지식을 쏟아낸다. 다름아닌 방대한 독서량 덕분이다. 특정 테마의 글 한 편을 쓰기 위해 약 500 권의 책을 읽는다는 것이다. 독서에 관한한 名不虛傳(명불허전)이라 할만하다.

늦더위가 겨우 물러갔나 했더니 어느새 10월이다. 이맘때면 늘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단어가 '燈火可親(등화가친)'이다. 등불을 가까이 하기에 좋은 계절, 즉 책 읽기 좋은 때다. 해마다 가을이면 연례행사처럼 독서주간이 찾아오고, 거리엔 독서를 권장하는 플래카드가 나부낀다. 평소 책과는 지구와 달의 거리보다 멀던 사람들도 이때쯤엔 왠지 시집 한 권이라도 읽어야만 될 것 같은 심정이 되고 하다 못해 책꺼풀의 먼지라도 털어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혹자들은 말한다. 독서에 무슨 계절이 따로 있느냐고, 선선한 날씨에 어디론가 자꾸 떠나고 싶어지는 가을은 독서하기에 오히려 좋지 않은 계절이라고….

하지만 사계 중 가을만큼 우리 내면을 고요히 들여다보게 만드는 계절은 없다. 풍성한 수확의 기쁨과 凋落(조락)의 덧없음이 겹쳐지는 묘한 이 계절은 우리로 하여금 生(생)의 근원적인 문제들을 바라보게 한다. 눈가리개한 말처럼 앞만 향해 달려가는 우리에게 때로는 옆도 뒤도 돌아보며 좀 천천히 가라고 말해준다. 빠르고,높고,크고,화려한 것들에 기울어 있는 우리 더러 느리고,낮고,작고,소박한 것들의 미덕을 조곤조곤 들려준다. 하늘빛처럼 마음도 투명해지는 가을은 책을 가까이 하기에 더없이 좋은 때다.

그런데 이 계절에 돌아보는 우리의 독서 문화는 부끄러운 현실을 새삼 깨닫게 한다. 2005년 미국의 다국적 여론조사기관 NOP월드가 세계 30개국 3만여 명을 심층 면접조사한 결과 우리 국민은 책·잡지 등 활자매체를 읽는데 쓴 시간이 주당 3.1 시간에 그쳤다. 30개국 평균 6.5 시간에 훨씬 못미쳤을 뿐 아니라 조사대상국 중 꼴찌로 나타났다. 한 조사에 따르면 10~20대는 하루 평균 2시간을 인터넷에 소비하지만 순수 독서 시간은 10분에 불과하다. 성인 10명중 2,3명은 책이라곤 1년에 단 한 권도 안 읽는다. 얄팍한 정보 취득에만 열을 올릴뿐 책을 통해 얻는 지적 능력이나 창의력, 감성 계발 등에는 도무지 무관심한 세태다.

이런가운데 최근 독서 능력과 행복감의 상관 관계가 크다는 영국 국립 독서재단의 조사결과는 관심을 끌만하다. 독서를 즐기는 사람들은 남녀 모두 이성 관계도 좋으며 흡연과 음주 빈도가 낮고 안정적인 가정생활 등 독서를 즐기지 않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행복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자기 집을 소유하고 있는 비율 등 경제적 능력에도 큰 차이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몇개월간 소고기 파동으로 온 나라 안이 출렁거리더니 이번엔 멜라민 공포가 우리 식탁을 잔뜩 위협한다. 입 있는 사람들 모두가 안심하고 먹을게 없다고 한탄한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 '몸'의 문제에는 온 나라가 화들짝 소란스러우면서도 '마음'의 빈곤에는 너무 무관심하지 않은지…. 웰빙이 최고의 미덕이 된 이 시대에 정신적 웰빙의 통로인 '책'이 설 자리는 어디인지….

전경옥 논설위원 sirius@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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