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화재 & 문화] 에밀레종

경주국립박물관 앞뜰에는 국보 제29호 성덕대왕신종이 자리하고 있다. 이 종은 통일신라 혜공왕 때 완성되어 원래 봉덕사에 걸어두었다고 하여 간혹 봉덕사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종을 보면 누구나 먼저 머리에 떠올리는 말은 '에밀레종'이다.

성덕대왕신종이라는 정식명칭을 제쳐두고 한낱 전설에서 따온 이름이 널리 통용되는 것은 다소간 못마땅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구태여 탑골공원이라고 정색하여 말하지 않고 그저 파고다공원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한 때도 있었듯이, 이것을 에밀레종이라고 부른들 너무 탓할 일만은 아니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간혹 이 에밀레종이라는 말은 절대 쓰면 안 된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그 어떠한 고문헌 속에서도 에밀레종이라는 표현이 등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살생을 엄격히 금하는 불교에서 어린아이를 산 채로 쇳물에 넣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이러한 주장의 요지이다.

나아가 이러한 에밀레종 전설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학자에 의해 창안되어 고의적으로 유포된 것이라는 주장도 나돈다. 과연 그러한 것일까?

이러한 일본인들의 자료로는 1920년에 발간된 오쿠다 데이의 '신라구도 경주지'가 가장 빠른 편이고, 경주공립보통학교장이었던 오사카 긴타로가 '조선' 1921년 3월호에 기고한 '경주의 전설'에도 에밀레종 전설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들의 기록은 경주지역에 남아있던 에밀레 전설을 채록했던 결과이지 스스로 창작하였다고 볼 수 있는 근거는 없다.

더구나 이 같은 전설은 이들의 기록에서 처음 발견된 내용은 결코 아니었다. 이들에 훨씬 앞서 개화기 이후 우리나라에 머물렀던 몇몇 서양인들에 의해서도 에밀레 전설이 진작에 채록된 흔적이 확인되고 있는 까닭이다.

예를 들어 대한제국 시절 주한미국공사를 지낸 호레이스 알렌은 '코리안 리포지토리' 1895년 4월호에 에밀레(Ah May la) 전설을 소개한 적이 있었고, 독립운동가로 추앙되는 호머 헐버트 박사 또한 '코리아 리뷰' 1901년 1월호에 에밀레(Emmille) 얘기를 채록하는 한편 1906년에는 유명한 그 자신의 저작물 '대한제국 멸망사'에 다시 이 얘기를 수록한 적이 있었다.

이들이 에밀레종을 서울 보신각의 그것으로 연결하고 있는 점은 엉뚱하지만, 이들의 기록은 적어도 에밀레종 전설이 일본인들에 의한 창작물이 아니라는 사실만큼은 명쾌하게 가려내주고 있는 셈이다.

물론 에밀레종의 전설이 일본인들과는 무관하게 진작부터 있어왔다고 해서 그 자체가 이러한 전설이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도 좋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에밀레종 이야기는 그만큼 종을 만드는 과정이 힘들고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의미에서 나온 설화이지, 실제로 그러한 일이 있었다고 보기는 매우 어렵다는 것이 전문연구가들의 대체적인 의견이다.

이 점에 대하여 일찍이 미술사학자 고유섭 선생은 "요요부절하는 이 종소리의 여운의 특색을 형용키 위하여 고래로 있는 흔종의 사실과 합쳐져 지어낸 설명으로 형용설명의 소박성을 우리는 오히려 예술적 흥취 있는 것으로 들을 수 있다"고 설명한 바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흔종'이라는 표현은 '새로 만든 종의 갈라진 틈을 짐승의 피로 메우는 의식'을 뜻한다.

결국 전설은 전설일 뿐이다. 하지만 그러한 전설조차도 성덕대왕신종의 존재를 깊이 되새겨보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구태여 내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이러한 점에서 성덕대왕신종을 에밀레종이라 한들 하등 나쁠 것은 없지 않을까 싶다.

이순우 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