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코스모스 길

수성구 달구벌대로의 신축빌딩 외벽에 코스모스 꽃이 활짝 피어있다. 몇 송이 꽃잎이 건물을 감싸며 꼭대기 층까지 목을 늘이고 있다. 신선한 그림이 신기한 듯 지나는 사람마다 발걸음을 멈춘다.

십여 년 전 어느 가을날. 아내가 퇴근하여 오자마자 선걸음에 코스모스 꽃구경을 가자고 나를 졸랐다. 그곳은 가창 지나 팔조령 넘어 유등마을 근방이었다. 차 다니는 큰길 뿐 만 아니라 동네로 들어가는 들길 양쪽에도 온통 코스모스가 가득했다. 바람에 물결 짓는 꽃들이 어서 오라고 마구 손짓을 하는 듯했다.

갖가지 자태와 색깔의 꽃들이 누렇게 익어가는 황금들판을 배경으로 끼와 향기를 무진장 뿜어내고 있었다. 벌써 소문이 났는지 많은 사람들이 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느라 분주하다. 휠체어를 끌고 가는 노부부의 모습이 눈길을 끈다. 할아버지는 앉고 할머니는 밀고 가며 연신 해맑은 웃음과 다정한 대화를 주고받는 품이 여느 속인들과는 달리 행복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어릴 때 돌담 옆에 활짝 핀 코스모스 한 무더기를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보며 얘기하시고, 다정히 웃으시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무슨 얘기를 하셨을까? 너무나 근엄하시던 아버지도 꽃에는 약하셨던지….

나는 슬며시 아내의 손을 잡았다. 코스모스처럼 가녀린 아내가 꽃보다 더 아름다운 미소를 피워 나에게 보낸다. 아내의 향기가 아직 가슴에 실금처럼 남아 있다. 논일 나온 사람들이 갖고 온 라디오에서 김상희가 부른 '코스모스 피어 있는 길'이란 노래가 들 한가운데서 울려 퍼지며 분위기를 돋우었다.

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있는 길 / 향기로운 가을 길을 걸어갑니다.

기다리는 마음같이 초조하여라. / 단풍 같은 마음으로 노래합니다. … (후략)

'여보! 우리 내년에도 또 오재이.' 나는 이렇게 속다짐을 했다. 그 뒤로 수없는 가을이 지났지만 유등마을에 다시 가보지 못했다. 그때처럼 아름다운 코스모스 길이 요즈음도 그곳에 펼쳐지고 있을까? 오는 토요일에는 내가 먼저 가 보자고 보채봐야겠다.

삭막한 도시생활에서 시골길을 걷는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꽃향기를 못 느끼는 도시인들에게 눈으로라도 코스모스 꽃을 볼 수 있게 해 준 빌딩 관계자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다른 빌딩에도 화사한 그림들이 그려져 시민들의 메마른 정서를 아름답고 풍성하게 보듬어 주었으면 좋겠다.

공영구(시인·경신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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