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2월 14일 미국에서는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뉴욕타임스가 워런 버핏이나 조지 소로스, 빌 게이츠의 아버지 윌리엄 게이츠 같은 부자 120명이 부시 대통령의 상속세 폐지 정책에 반기를 들었다는 기사를 실은 것이다. 이어 이들은 지속적으로 '상속세 폐지 반대 청원' 광고를 실었다. 당시는 부시 미 대통령이 감세를 통해 경제를 살리겠다며 상속세 폐지방침을 밝히고 나선 터였다. 이에 대해 내로라하는 미국의 부자들이 '안 된다'고 들고일어난 것이다. 가장 득을 볼 부자들이 갓 취임한 새 대통령의 정책에 반기를 들었으니 미국에서는 '사람이 개를 물었다'고 했다.
이들은 왜 세금을 없애 주겠다는 대통령의 정책에 반기를 들었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세금을 적게 내면 중산층, 저소득층이 세금을 더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미국 내 2%의 부자들만이 물고 있는 상속세를 폐지하면 결국 백만장자, 억만장자의 후손만 배불리고 서민들이 그 피해를 고스란히 가져가게 된다"는 논리다. 富(부)가 편중되는 것은 국가나 사회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이들이 가진 도덕이다. 지금도 상속세 폐지 반대 운동은 계속되고 있다.
이들은 세금을 나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보지 않고 공동체의 관점에서 보고 있다. 이른바 미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가진 자의 의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부와 권력, 명성에는 그에 상응하는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나라라고 해서 이런 정신이 없었을 리 없다. 1600년대 초부터 300여 년간 부와 명성을 유지한 경주 최부자 집안은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한 집안이 이렇듯 오랜 기간 부를 유지한 것은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이는 역설적이게도 최부자 집안이 지나치게 가지는 것을 경계하고 가진 것을 나눌 줄 알았기에 가능했다. 최부자 집의 가훈 중 하나는 '재산은 만 석 이상을 모으지 마라'였다. 후손들에게 부에 대한 욕망을 절제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친 것이다. 후손들은 이를 지키기 위해 다른 부잣집에서 70%까지 받던 소작료를 40%까지 낮췄다고 한다. 그렇다 보니 최부자가 논을 사면 일대 주민들이 반겼다. 부는 더 이상 嫉視(질시)의 대상이 아니었다. '사방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원칙도 있었다. 춘궁기가 되면 곳간의 쌀을 풀어 굶는 이웃과 나눴다. 심한 춘궁기면 약 800석을 보관할 수 있는 곳간이 텅 빌 정도였다고 한다.
온 나라가 쌀직불금 문제로 벌집을 쑤셔 놓은 듯하다. 공직자를 비롯해 금융계, 전문직, 언론계 등 소위 먹고살 만한 17만 명이 농민에게 돌아가야 할 직불금을 가로챈 사건이다. 일부 억울한 경우야 가려보아야겠지만 그 배경에는 양도소득세를 물기 싫다는 얄팍한 계산이 자리 잡고 있다. 2006년 통계에 따르면 국민 4천899만 명 가운데 72.1%는 전혀 땅을 갖고 있지 않다. 나아가 전체 인구의 1%가 전체 개인소유 토지의 56.7%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우리나라의 토지 소유 편중은 심각하다. 그러니 이번 사건은 가진 자들이 더 갖기 위해 탐욕을 부린 결과로 봄직하다.
미국에는 '책임을 다하는 부(Responsible Wealth)'라는 단체가 활동하고 있다. 부와 소득에서 상류 5% 내에 드는 부자 700명이 회원인 모임이다. 이 모임의 활동 목적은 특이하다. 행동강령으로 공평과세를 내세운다. 이들이 주장하는 공평과세란 세금을 낼 만한 사람이 내지 않으면 세금조차 못 낼 계층이 이를 덤터기 쓰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자들의 세금을 깎는 것은 공평과세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들의 세금을 깎지 말라고 한다. 상속세 폐지 반대 캠페인도 그 중 하나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일찍이 '富(부)는 거름과 같다'고 했다. 그냥 쌓아두면 악취를 풍기지만 뿌려지면 땅을 기름지게 한다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나눔은 사회를 풍요롭게 하지만 쌓인 부는 온갖 사회악의 근원이 된다. 우리나라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실종됐다. 그러니 악취가 진동하는가 보다.
鄭昌龍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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