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부끄럼쟁이 모범생, 유럽을 울리다…재즈보컬 나윤선

2004년 11월 어느 날이었다. 후배 손에 이끌려 간 낯모르는 재즈 가수의 공연. 퇴근길 정체를 핑계로 공연 시간에 20분이나 늦었으니 꽤 무례한 관객이었다. 조심스레 자리를 잡고 앉자 재즈 보컬로는 낯선 목소리가 귓전을 파고들었다. 가늘고 높으면서도 머리카락 끝까지 전율이 일게 하는 목소리. 좀처럼 재즈 가수 같지 않은 그녀의 '포스'에 숨이 턱 막히는 느낌. 앙코르 곡이 끝날 때쯤 때늦은 후회가 밀려들었다. '공연 시간에만 맞춰왔다면 그녀의 노래를 20분은 더 들을 수 있었는데….' 그날 이후 기자는 그녀의 열렬한 팬이 됐다.

나윤선(39)은 CD보다 라이브가 100만배쯤 더 매혹적인 가수다. 국내 재즈 보컬 중 그녀만큼 대중성을 확보한 가수도 없고, 그녀만큼 유럽에서 명성을 쌓은 가수도 없다. 지난달 6집 '부아야주(voyage)'를 내고 전국 투어를 돌고 있는 그녀를 15일 서울 청담동에서 만났다. 그녀는 일찌감치 나와 자리를 잡고 있다. "제가 경상도 사투리를 되게 좋아해요. 생애 첫 소개팅에서 만난 남자가 '밥 묵었나'라며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데 얼마나 멋있던지. 하하." 인터뷰를 시작하기도 전에 이런저런 수다를 떨다 30분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

"사람들 앞에 서는 게 제일 어색해요." 무대에 선 지 10년째지만 그녀는 여전히 쑥스러움을 많이 탄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게 '카메라'라는 그녀다. 대중과 만남을 전제로 한 그녀의 직업은 성격과 참 안 맞다는 생각이 든다. 끼도 없고 춤도 못 추고 밤에 나가 놀지도 않는다. "밤에 나가서 술 마시고 노래방 가고 그런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텔레비전을 안 보니까 유행하는 것도 잘 모르고 다 느려요." 1년 중 절반을 머무는 프랑스에서의 삶도 별반 다르지 않다. "심심하지 않아요?" "심심하죠. 되게 외롭고. 날씨가 찌뿌드드한 날 혼자 앉아 있으면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나.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 그런 생각도 들고요."

그녀는 모범생. 늦은 밤 아무도 없는 길을 운전하고 가다가도 신호가 걸리면 지나치지 못하고 서서 기다리는 사람. "주차를 할 때 주차선에 정확히 맞춰서 주차를 하는 편이세요?" 아니나 다를까. "몇 번을 해서라도 정확히 집어넣어요. 피곤한 사람이죠. 누가 그렇게 하라고 한 것도 아닌데 그래요. 노래도 너무 정갈하고 정돈되게 한다는 사람도 있어요. 그렇게 살면서 놓친 게 많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녀가 재즈를 하면서 가장 괴로웠던 것이 자신의 틀을 깨는 작업이었다. 그런 면에서 나윤선이 프랑스에서 재즈를 시작한 건 행운인 듯싶다. 다른 삶의 방식과 문화를 인정해주는 프랑스 문화 덕분이다. 그녀는 자신이 재즈를 할 수 없을 줄 알았다. 미성에다 톤이 높은 자신의 목소리는 담배 연기 자욱한 클럽에서 낮고 허스키하게 울리는 재즈보컬과는 거리가 멀었다. "처음에는 콤플렉스가 많았죠. 그런데 저보다 훨씬 목소리가 가늘고 높은 사람도 음반을 내는 유럽의 재즈 문화를 보면서 '내가 가진 소리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만 하자'고 결심했어요."

'내 방식대로'를 고집하지 않는 그녀도 하기 싫은 것이 있다. "제가 성공을 하면 얼마나 하겠어요. 그래서 성공이나 명예, 돈을 위해 욕심을 내서 무언가 하는 게 싫어요. 가끔 타협도 해야 되고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도 해야 되고. 그런 것에서 자유로워진 것 같아요. TV나 라디오 프로그램을 하자는 제의도 있는데 'NO'. 제가 할 줄 아는 건 노래밖에 없고, 하고 싶은 것도 노래밖에 없으니 그것만 하고 살려고 해요."

◆나는 팔자를 믿는다

나윤선은 27세가 되어서야 재즈를 시작했다.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음악을 한다거나 가수가 되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선생님'이 꿈이었고, 대학가고 취직해서 남들처럼 사는 게 당연한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의 부모는 모두 음악을 직업으로 사는 이들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합창계의 대부로 불리는 나영수 국립합창단 단장이고, 어머니는 뮤지컬 1세대인 성악가 김미정씨다. 그런 집안에서 음악가를 꿈꾸지 않았다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 "노래를 곧잘 불렀지만 음악은 그저 취미였고, 어렵다고 생각했어요."

'오늘을 살자'가 좌우명이고 계획을 세워서 인생을 살지 않는다는 그녀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대학(건국대 불문과)을 졸업하고 '남들이 다 취직을 하니까' 의류회사 카피라이터로 취직했다. 하지만 직장생활은 그녀에게 맞지 않았다. 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싶었고, 결국 8개월 만에 백수가 됐다. 막막하게 놀고 있던 시절, 친구는 그녀에게 '노래를 해보라'며 등을 떠밀었다. 친구는 그녀도 모르게 데모 테이프를 '지하철 1호선'의 제작자 김민기씨에게 보냈고, 덜컥 주연으로 뽑혔다. 그리고 1994년 '지하철 1호선'에서 옌볜 처녀 역으로 처음 무대에 섰다. 주변에서는 '도대체 쟤가 누구냐, 진짜 옌볜에서 데려온 거냐'며 놀라워했다.

두 편의 뮤지컬을 더하고 그녀는 미련없이 뮤지컬 배우의 길을 접었다. "춤도 못 추고 연기 훈련을 받은 적도 없고, 뮤지컬은 너무 어렵더라고요." 일본 극단 '사계'의 스카우트 제의와 프랑스 유학 사이에서 갈등하던 그녀는 프랑스행 비행기를 선택했다. 1995년 그녀는 유럽 최초의 재즈학교인 프랑스 재즈 스쿨(CIM)로 유학을 떠났다. 샹송과 재즈를 둘 다 배워보겠다는 요량이었다. 샹송은 정서적으로 맞지 않았고, 그녀는 재즈에 심취했다. 재즈스쿨만 다니기에는 모자란 것 같아 컨서버터리에서 재즈 보컬을 더 배웠고, 성악을 공부하기 위해 앙상블학교인 폴리포니학교에도 다녔다.

평범한 모범생으로 살았고, 변화에 목마르지도 않았던 그녀의 인생이 드라마틱하게 변한 이유는 무엇일까. "저는 '팔자'가 있다고 믿어요. 대학 시설 프랑스문화원에서 주최하는 샹송대회에서 대상을 받을때 친구에게 떠밀려 나갔고, 지하철 1호선 출연도 친구가 대신 나선 덕분이었어요. 프랑스에도 저는 3년만 공부하고 돌아올 생각이었거든요. 이렇게 될 줄은 정말 몰랐죠. 그저 운이 좋았고, 음악을 할 팔자여서 그랬던 것 같아요. 저는 언제 음악을 그만두더라도 팔자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일 것 같아요." 목소리를 잃는다면 어떻게 살 것인지 물어보려던 기자가 머쓱해졌다.

◆나는 세계적인 재즈 보컬이 될 수 없다

-왜 세계적인 재즈 보컬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세요?

"저는 제 한계에 대해 잘 알고 있어요. 동양인으로서 넘지 못하는 벽이 있어요. 외국인들이 국악을 하더라고 최고가 될 수 없는 것과 같죠. 참 고맙게도 재즈에는 다양한 장르가 있고, 제가 한국인이라는 특이함 때문에 어느 정도까지는 할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제가 엘라피츠 제랄드나 빌리 할리데이, 사라 본이 될 수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죠."

-음악을 하지 않았다면 뭘 하고 있을 것 같나요?

"그냥 아기 낳고 평범한 주부로 살지 않았을까요? 너무나 낙천적이거나 아무 생각이 없는 걸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제가 우연히 왔던 길이 이 길이었기 때문에 지금 모습이 가능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이미 그 길 위에 있었을 수도 있고요."

-한국과 프랑스를 오가고 세계 각지에서 공연을 하는데 한 곳에 정착하고 싶다는 생각은 해보셨어요?

"3, 4년 전까지는 그런 생각을 했는데 지금은 하지 않아요. 아마 제가 결혼을 했다면 이렇게 살지 못했을 거예요. 그랬다면 굉장히 무책임한 행동이겠죠. '인생은 나그네'라는 말이 제게 딱 맞는 것 같아요. 하도 비행기를 많이 타니까 '이게 떨어지기도 하겠지?'라는 생각도 해요. 이제는 '내가 있는 곳이 집이지' 해요. 늘 중심에서 떨어져 살다 보니 인생의 가지를 치는 일이 더 쉬웠던 것 같아요."

-공연 일정을 쭉 훑어보니까 대부분 소도시네요. 소도시일수록 재즈 팬들의 층도 엷고 관객 동원도 힘들텐데요?(그녀의 새 공연 일정은 울산, 용인, 가평 등 소도시 위주로 꾸려져 있다. 오는 30일에는 경북 군위 문화예술회관에서도 무대에 오른다.)

"프랑스 시골이나 한국의 시골이나 관객 반응이 똑같아요. 충남 태안에서 공연을 했는데 77세 되신 할아버지께서 공연 후에 줄을 서서 싸인을 받으시더라고요. '내가 아마 최고령 팬일 것'이라면서요. 프랑스에서도 너무 멋지게 차려입은 할아버지가 끝까지 기다리셨다가 '최고의 공연이었다'고 칭찬하고 가시고. 그분들과 제가 감정이 전달됐다는 의미겠죠. 저는 공연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가요."

◆인생의 항해에 대해

-나윤선 퀸텟과는 완전히 결별한 건가요?

"그런 건 아닌데요. 멤버들과 오해가 좀 있었어요. 세계적인 재즈레이블인 '블루노트'에서 음반을 내자는 제의가 왔는데 저만 딱 떼어내서 작업하길 원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NO'를 했는데 이런 사실을 모르는 멤버들이 '네가 뭔데 블루노트의 제안을 거절하냐'고 오해를 했죠. 굉장히 섭섭하긴 했는데 뭐, 언젠가는 다시 만나서 음악을 하겠죠."

-퀸텟으로 활동할 때와 울프 바케니우스와 듀오로 무대에 오르는 것과 어떤 차이가 있나요?

"퀸텟은 5명이기 때문에 사운드 하나하나에 훨씬 신경이 쓰여요. 곡을 하나 만들 때도 서로 부딪히지는 않는지 조율해야 하고. 듀오는 연주자와 더 가깝고 제 내면에 더 집중을 할 수 있죠."

-어둡고 슬픈 노래를 부르다보면 너무 흠뻑 빠져서 스스로 힘들 때도 있나요?

"그럼요. 저는 공연하다가도 잘 울어요. 어떤 곡들은 정말 '딱 내 얘기네' 그런 감정에 더 빠져들고. 이번 앨범에서는 '부아야주'가 그런 것 같아요. 삶이 배를 타고 가는 항해였다면 내가 항구에 제대로 도착을 한 건지. 힘든 일을 겪으며 여기까지 왔는데 이게 맞는 길인지. 그런 내용이 정말 제 심정을 말해주는 것 같아요. 제가 즐거운 노래보다 슬픈 노래를 부르길 더 좋아해요."

-그동안 일렉트로니카, 팝, 가요, 힙합 등 여러 장르의 음악과 크로스오버를 시도했는데 정말 하고 싶은 음악은 무엇입니까?

"저는 장르보다는 함께 연주하는 뮤지션과의 교류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와 마음이 맞는 뮤지션과 함께하는 게 장르보다 중요한 것 같아요. 그래서 다음에 제가 누구와 어떤 음악을 하게 될지 잘 모르겠어요. 저도 참 궁금해요. 어떻게 될지. 10년 뒤에는 남미의 작은 도시에서 노래를 하고 있었으면 좋겠지만."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사진·프리랜서 장기훈

▨ 나윤선은?

1969년 서울 출생. 27살 늦깎이로 재즈를 시작, 미국 다음으로 큰 재즈 시장인 프랑스에서 각광을 받았다. 1999년 생모르 재즈 콩쿠르 대상, 라데팡스 콩쿠르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았고 르몽드, 르 피가로 등 프랑스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2001년 한국으로 돌아와 솔로앨범 '르플레'를 내며 대중적인 인지도를 넓히기 시작했고, 2004년 제1회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크로스오버, 2005년 문광부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대중 예술부문, 2008 제5회 한국대중음악상 재즈 & 크로스오버 부문 올해의 음악인상을 받았다. 최근 10여년 간 함께 활동하던 퀸텟과 결별하고 스웨덴 출신의 세계적인 기타리스트 울프 바케니우스와 호흡을 맞춘 6집 '부아야주(Voyage)'를 냈다. 내년 2월에는 미국·일본 등 38개국에서도 발매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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