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대구 사람들 힘 좀 내자고요!…성형외과 의사 김덕영

사진·정재호기자 newj@msnet.co.kr
사진·정재호기자 newj@msnet.co.kr

한사코 인터뷰를 거절했다. 할 말도 없고, 할 말이 있다해도 하지 않아야 할 때가 있다고 했다. 굳이 그 사람을 만나야 할 필요는 없더라도 그 사람에게 듣고픈 말은 있는 법이다. 대구에서 손꼽히는 의원(김&송 성형외과)의 원장으로, 배영학숙(대구보건대학) 재단이사장으로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궁금했다. 김덕영(56) 원장과 만나면 이후 스케줄은 비워두는 게 마음 편하다. 좀처럼 입을 열지 않을 듯 하다가도 한번 말문이 터지면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영역과 시간을 넘나든다. 1시간 이야기하면 55분은 들을 각오를 해야 한다. 하지만 지루하거나 짜증스럽지 않다. 물론 하고픈 말이 많은 사람에게는 곤혹스러울 수 있겠지만. 아는 사람은 어찌 그리 많은지. 그의 말 습관 중 하나가 이렇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로 시작하지 않는다. '내가 아는 ○○○가 있는데,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어떤 일을 겪었고 과거에는 이랬던 사람인데'로 시작한다. 그러자니 이야기가 길어질 수밖에. 사람인 이상 미워하는 사람, 서운한 사람도 있겠지만 일단 그는 사람을 참 좋아한다. 그 이야기를 다 지면에 옮기자니 감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조금 매몰찰 수도 있겠지만 미리 질문지를 보내고, 곁가지로 흘러가지 말고 일문일답으로 하자고 다짐을 받았다. 하지만 약속처럼 되지는 않았다.

◆사회인으로 산다는 것

-성형외과 의사 외에도 여러 가지 직함을 맡고 있는데, 이유가 뭡니까?

(그는 김&송 성형외과원장, 대구보건대학 재단 이사장, 해외의료봉사단 이사장, 대구광역시 중구 문화원장 등을 맡고 있다. 의사와 학교 재단 이사장도 어울리지 않고, 게다가 문화원장이라니. 하긴 그는 클래식 작곡까지 할 정도로 음악에 조예도 깊고, 최근엔 대구 사람들 힘 좀 내자는 뜻으로 '앗싸, 대구야!'라는 트로트곡을 만들어 반주 녹음까지 마쳤다.) "대구보건대학이 교내 분규로 내홍을 앓고 있을 때 보건대학 특성도 살리고 학교 발전도 시켜야겠다는 마음에서 이사장직을 수락했습니다. (그는 학교와의 각별한 인연 때문인지 애착도 강했고, 아직 이사장 판공비 한 푼 써 본 적이 없다고 했다.) 해외의료봉사단은 강진성 은사님이 퇴직금 일부를 쾌척하셔서 사단법인을 만들었는데, 매년 한 번씩 언청이나 화상으로 변형된 환자를 무료 수술하러 갑니다. 요르단, 스리랑카, 필리핀, 몽고 등지에 7차례 가서 40명 가량을 수술하고 왔습니다. 중구문화원장은 지역 선배 의료인들의 요청으로 문화기부를 통한 봉사를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겁니다. 보시다시피 거창하게 이름 나는 직함은 없습니다. 그저 지역에서 많은 도움을 받고 살다 보니 그만큼 제 몫을 하려는 겁니다."

-경북고를 나오셨는데, 대구에서 살아가면서 경북고 출신이라는 건 무엇을 의미합니까?

"경북고 동기 기수 중에 의료인이 82명이나 됩니다. 단일 고교, 단일 기수에서 이만큼 많은 의사를 배출하기는 처음일 겁니다. 서울대병원 부원장을 비롯해 대구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게 자랑스럽고 그 중에 제가 속해 있다는 것이 뿌듯하기도 합니다. 제 주위에 경북고만 모여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릴 때부터 지내온 정이 각별한 것은 사실이지만."

-누구나 미워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 기준은 무엇입니까?

"주위를 돌아보면서 착실하게 사는 사람을 보면 제가 즐거워집니다. 하지만 저만 알고 거만하게 구는 사람을 보면 화가 납니다. (거만한 것과 자신감 넘치는 것의 차이가 무엇인지 물었더니) 주위에 불쾌감을 준다면 거만스러운 거죠."

◆의료인으로 산다는 것

-의사의 꿈을 품게 된 계기는 무엇이며, 지금 꿈 꾸던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버지가 섬유업을 하셨는데 아들을 의사로 만드는 게 꿈이었던 모양입니다. 저는 당시만 해도 공대 요업학과(세라믹과 또는 무기공학과)를 가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권유로 의사가 됐습니다. (이 질문을 할 즈음,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대화 내용으로 짐작컨대 건강보험 심사평가원에서 심사위원으로 위촉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모양인데, 그는 한사코 사양했다. 그러면서 주위에 그런 일을 맡을 사람들을 천거했다.) 가정 형편이 극히 어렵거나 사고로 다친 아이들에게는 아직 치료비를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것까지 다 받자면 한도 끝도 없어요. 제가 잘났거나 돈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그저 제 양심 한 귀퉁이에 조금 찔린 구석이 있어서 그런 것이겠죠. 제가 아는 경북대병원 한 의사는 수술이 끝난 뒤 환자가 고맙다며 건네는 촌지를 스스럼없이 받습니다. 왜 받는 줄 아세요? 그 돈 받아서 환자분 이름 그대로 고아원에 기탁하려고 그런 겁니다. 자기가 돕는 걸로만은 부족하니 그렇게 주는 돈도 고맙다더군요."

-연간 수입은 얼마나 되며, 삶에서 돈이란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제 수입은 국세청만 알고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하하. 그렇다고 제가 부자는 아닙니다. 반월당네거리에 분원을 내기는 했지만 환자가 넘쳐나서 그런 게 아닙니다. 연령별로 특화했을 뿐이고, 아직 분원은 홀로서기가 벅찬 상태입니다. 버는 만큼 나가는 것도 많습니다. 제가 부양해야 할 식구도 많고 도움을 바라는 손길도 많습니다. 살면서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도덕적 의무감이 있을 때만 그 소유가 당연한 것이겠죠. 저 혼자 잘 먹고 잘 살겠다고 돈을 버는 사람, 주위에 많습니다."

-성형에 대해서 아직 부정적 시각도 있는데, 어떻게 보십니까?

"선천적, 후천적 기형을 정상에 가깝게 노력하는 외과의 한 분야가 바로 성형외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미용 부분은 균형을 갖추어 주는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다만 너무 상업적으로 흐르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지난 해 우연히 기자가 그를 만났을 때, 몽골에서 한 아이가 눈 주위 성형수술을 받으러 와 있었다. 한쪽 눈이 후천적으로 멀면서 눈 주위 근육과 뼈가 제대로 발달하지 않아 약간의 안면 기형이 온 것. 이 먼 나라에 무료 수술을 해준다기에 왔지만 묵을 곳도, 먹을거리를 살 돈도 없었다. 김 원장은 아는 사람을 총동원해서 이 문제를 해결해 주고 수술도 무사히 마쳤다. 조만간 그 아이가 재수술 때문에 온단다. 아직 성장단계이기 때문에 수술이 마무리되려면 많게는 서너차례 수술이 더 필요한 상태. 하지만 김 원장은 '이왕 돕기로 한 것 끝까지 도와야지'라고 웃어보였다.)

-대구경북 의료특구에 대해 원장님이 갖고 있는 비전은 무엇입니까?

"대구경북 의료특구는 어느 지역도 쉽게 따라하기 어려운 심장, 폐 센터가 더욱 절실하다고 생각합니다. 미용수술이나 모발이식 등은 어느 지역에서도 활성화가 가능하지만 심폐센터처럼 고도의 전문성이 필요하고, 또 그에 수반되는 의료기기 산업시장도 거대하기 때문에 우리 지역에서 선점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저는 심폐센터가 세워질 경우 1억원을 기탁하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인터뷰를 한 날에도 중국에서 의료관광 시찰팀이 그 지역 방송팀과 함께 병원을 찾아왔다. 사전에 연락이 있었지만 구체적인 방문 일정 및 내용이 협의되지 않아 적잖이 당황스런 상황. 하지만 김 원장은 기왕에 온 손님이라며 최선을 다해 맞았다.)

◆아버지와 남편으로 산다는 것

-가장으로서 가족들에게 하고픈 말이 있다면?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하자는 게 우리 집 가훈 격이죠. (김 원장의 아내는 지금 병마와 싸우고 있다. 아내는 이화여대 철학과를 졸업한 철학박사다. 그는 인터뷰 중 아내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았지만 대화 곳곳에서 그 흔적은 묻어났다. 그의 사무실 한 켠에 놓인 십자가도 마찬가지다. 있는듯 없는듯 그 존재감조차 잊고 있던 십자가상은 늘 창틀 위에 놓여있었는데, 어느 날 문득 봤더니 바닥에 떨어진 채 부러져 있더란다. 늘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겠다고 했지만 그렇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들던 그 때, 아내가 아프다는 말이 들려왔다. 마음이 너무나 아팠더란다. 젊은 시절, 그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충동적인 사고와 행동'이 부끄러웠던 때도 있었지만 그는 아내의 영향으로 많은 삶의 변화를 갖게 됐다.) 치료과정이 힘들어도 내색하지 않고 잘 견디는 아내가 존경스러울 따름입니다. 우리 시대의 남편들이여, 아내를 존경합시다. 내 생에 가장 기쁜 순간은 우리 딸을 얻었을 때였습니다. 그런 기쁨을 누가 주겠습니까?"

-어려운 이웃들을 돕는 일도 많이 하는 걸고 알고 있는데, 가장 보람있었던 기억은 무엇입니까?

(그는 '어려운 환경에 있는 학생을 도와서 사법고시에 합격했을 때'라는 짧은 답변을 이메일로 보내왔다. 구체적인 내용이 궁금해 물었지만 한참을 주저했다.) "저 혼자 도운 것도 아니고,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데…. 그 학생은 제가 아는 후배 아들이었습니다. 부친이 갑작스레 사고로 숨진 뒤 망연자실해 있을 때, 저와 송중원 원장(김&송 원장)이 의기투합해서 학비를 댔습니다.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뒤 사시에 합격해 지금 군법무관으로 있습니다. 얼마 전 결혼도 했구요. 그런 모습을 보면 감격스럽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권한을 준다면(가령 대통령처럼), 가장 먼저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그가 보내온 이메일 답변을 그대로 싣자면 이렇다. '전인교육에 국방비만큼 투자하겠다. 진정 바르게 사는 사람들의 사회구현은 전인교육이다.' 갑자기 무슨 엉뚱한 소리인가? 전인교육이라니?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 그는 특히 힘주어 말했다.) "저를 인터뷰하러 온 이유도 모르겠고, 사실 제가 누군가를 돕는다고 해서 신문에 난다는 것은 더욱더 어불성설입니다. 제 마음 속 한 구석에 일만분의 일 만큼 남아있는 알량한 양심 때문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따름이죠. 하지만 남을 돕기는커녕 남을 아프게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살 길은 저마다 살아보겠다고 버둥거리는 '이기심'이 아니라 저가 잘 살고 나도 잘 사는 세상을 만드는 '이타심'이 가장 필요하다고 봅니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 김덕영은?=경북중·고 출신으로 한양대 의대를 졸업한 뒤 경북대에서 대학원을 마쳤다. 육군 군의관을 거쳐 계명대 의대 성형외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대구 가톨릭대학병원 성형외과 과장을 거쳐 '김&송 성형외과'를 열었다. 현재 해외의료봉사단(JIOST) 이사장, 대구보건대학 재단이사장, 대구광역시 중구 문화원장을 맡고 있다.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고 싶다며 '김&송 살롱음악회'를 시작해 벌써 18차례 개최했으며, '꿩의 꿈'이라는 피아노곡을 만들어 박탕 조르다니아(2005년 작고)의 지휘로 대구시립교향악단이 연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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