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엔화 대출·日부품수입 기업 '엔高 비명'

일본 엔화값이 최근 너무 올랐다. 지난해 이맘때까지만 해도 100엔 값은 700, 800원대였는데 1,500원을 훌쩍 넘어섰다.

일본의 금리가 워낙 낮다 보니 국내 기업은 물론 개인까지 나서 싼 이자의 엔화를 빌린 뒤 원화로 바꿔 썼다. 그런데 엔화값이 2배로 오르면서 빚도 2배로 커졌다.

부품소재기업이 절대 다수인 대구경북지역은 일본으로부터의 기초부품 수입 의존도가 큰데 엔화값이 오르면서 수입부담도 배가 됐다. 요즘 기업들은 "달러보다 엔화값이 더 문제"라며 곡소리를 내고 있다. 물론 해외시장에서 일본 제품과 경쟁을 해야 하는 일부 업종은 호기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도 있다.

◆엔화 얼마만큼 올랐나?

100엔값은 지난달 말 1,500원을 돌파한 뒤 내려가는 듯하더니 다시 급등, 지난 20일 1,500원을 넘어서 1,575.63원까지 올라갔다. 25일엔 31.62원이 내리기는 했지만 여전히 1,500원대를 고수중이다. 원/엔 환율은 1년 전에 비해 2배 오른 것은 물론 1991년 고시환율 집계 이후 최고 수준이다.

미국발 금융위기가 엔화값 상승세에 불을 붙였다. 미국은 물론 유럽까지 경제상황이 극도로 나빠지면서 '그래도 믿을 곳은 부자나라 일본뿐'이라는 인식이 확산돼 엔화가 안전자산으로 취급됐고 너도나도 엔화를 찾아나서면서 엔화의 값이 급등했다.

더욱이 제로 금리에 가까운 일본과 달리 그나마 높은 금리를 유지하던 유럽이 경기부양차원에서 금리 인하에 나서면서 이른바 '엔캐리 트레이드' 청산이 가속화됐다. 엔케리 트레이드란 저금리의 엔화를 빌려 다른 나라의 통화나 채권·주식 등에 투자하는 것. 전세계적인 금리 인하로 엔캐리 트레이드가 저금리 매력을 상실하면서 되갚겠다며 엔화를 찾는 수요가 늘고 있는 것이다.

대구은행 이성우 트레이딩부 부부장은 "대표적 저금리 통화였던 일본 엔화를 이용, 해외로 투자했던 자금들이 최근 금융시장에 공황이 닥치자 가지고 있던 주식을 팔아 엔화로 바꿔나가다 보니 엔화 수요가 급격히 증가, 엔화값이 급등하고 있다. 초강세를 나타내는 엔화를 안정시키기 위해 일본 중앙은행이 개입을 해도 역부족이다. 당분간 엔화값이 내려갈 가능성보다는 올라갈 확률이 더 높다"고 전망했다.

◆"우리 다 죽습니다"

대구 성서공단의 한 기계금속업체. 이 업체는 연간 200억원어치의 일본 부품을 들여와 자사 제품을 만든다. 수입부품 대금은 당연히 엔화로 지불한다. 불과 1년 전까지 엔화값이 700원대였으나 최근 1,500원을 넘어서면서 부품값이 불과 몇 달새 2배가 됐다. 200억원이 400억원이 될 상황에 놓인 것이다.

원자재의 30% 정도를 일본에서 수입해서 이를 가공해 내수와 일본 시장에 수출하는 성서공단의 A업체 임원은 "생산합리화와 경비절감을 통해 원/엔화 상승을 극복하려고 해도 한계가 있다. 계속해서 엔화가 상승할 경우 가격 인상을 하지 못한 제품에 대한 인상이 불가피하다"고 했다.

B기계금속업체 관계자는 "연간 80억원 정도의 부품 소재를 일본과 유럽에서 수입·가공 후 생산량의 절반 정도를 다시 일본과 유럽 등에 수출하고 있는데 부품소재값이 2배가 올랐지만 인상분을 제품 가격에 반영하지 못해 손실이 늘어나고 있다"고 했다.

또 다른 기계부품 업체인 C사는 "2년 전 기계 설비를 증설하면서 연리 2.0%로 40억원을 대출받은 후 최근에 원금을 상환하려니까 원화기준 상환액이 2배 이상 늘어났다"고 하소연했다.

지역의 한 인쇄업체 관계자는 "한 대에 10억원 하는 인쇄기계는 국산이 없어 전량 일본과 미국에서 수입하는데 환율이 올라가면서 매월 상환해야 하는 리스료가 2배 가까이 올랐다. 경기침체로 인쇄 물량이 예년의 50% 정도 줄어든 상태에서 종이와 잉크 등 원자재 상승과 인쇄기계 리스비용 부담 증가로 어려움이 많다"고 말했다

◆"우린 아직 괜찮아요"

일본 자동차 메이커들과 해외 시장에서 혈투를 벌이는 국내 자동차 업체들은 엔화 강세를 경쟁력 개선의 발판으로 삼아 수출시장 확대에 전력을 기울인다는 전략이다. 현대·기아차는 최근 환율로 인한 수혜 금액을 판촉비용과 광고·선전비, 딜러 지원 등 해외 시장에서 성장잠재력을 키울 수 있는 분야에 적극 투입하기로 했다.

전자·IT 업체들도 단기적으로는 구매 비용 상승을 초래하지만 중장기적으로는 가격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다는 반사이익이 예상된다.

일본 엔화의 강세로 일본인 관광객들이 저렴하게 해외여행을 즐기기 위해 한국으로 몰려들고 있어 국내 관광업계는 특수를 기대하고 있다.

◆대출만기 연장 등 필요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T)이 최근 발표한 '엔화 강세의 전망과 파급 영향'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으로부터 부품·기계류 등 중간재 수입 비중이 높은 우리 산업구조 특성상 올해 대일 무역적자가 사상 최고 수준인 300억달러 이상을 기록할 것으로 예측됐다.

실제 관세청이 발표한 '10월 수출입 동향 확정치'에 따르면 올들어 10월까지 우리나라의 대일본 무역적자는 289억8천500만달러를 기록했다.

'앤캐리 트레이드'에 동참했던 사람들, 즉 엔화 빚을 냈던 사람들도 앞이 캄캄해지고 있다. 최근 몇년새 대구경북지역 기업은 물론, 개인들까지 엔화 빚 내기에 열심이었다.

기업은행 대구경북본부의 경우, 63개 업체가 48억엔의 엔화대출을 쓰고 있다. 원화로 환산(1천550원 기준)하면 744억2천300여만원이다. 100엔값이 700원대였던 지난해 이맘때였다면 370억원 수준이었을 터다. 불과 1년 만에 빚이 2배가 된 셈이다.

기업은행 관계자는 "섬유쪽보다는 자동차부품 등 기계금속업종의 엔화대출이 많다"고 했다.

신한은행 대구경북본부도 326억원가량의 외화대출이 있는데 이 가운데 절반 정도가 엔화대출인 것으로 추정된다.

신한은행 한 관계자는 "기업들은 물론 의사 등 개인사업자들까지 엔화대출에 나섰었다. 지금 이런 환율 추이라면 만기가 되어도 상환을 하지 못한다. 상환을 연기해주는 등의 대책마련을 하고 있다"고 했다.

◆금융위기 진정되어야 내려간다

대구은행 이성우 부부장은 "한·중·일 통화스와프 등 가시적인 안정조치가 나와야 엔화값 급등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정부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외환시장에서는 정부 차원에서 한국경제의 대외 신인도를 올려 원화가치가 회복되도록 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원화값이 더 이상 엉망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정부가 강력한 구조조정을 통해 한국의 신뢰도를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김진만기자 facfk@msnet.co.kr 최경철기자 koala@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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