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7년 동안 이순신 장군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수군의 명장이고 영웅이었다. 그러나 왜란 당시 수군의 힘만으로 나라를 지켰을까? 육지에서 조선군대는 처참한 패배만 거듭했을까?
임진왜란 초기 파죽지세로 밀려온 일본군에 조선군이 밀린 것은 사실이지만 육지에서도 조선군은 선전했다. 임진왜란 후반기 일본군이 남해 순천에서 동해 울산에 이르기까지 산성을 쌓고 움직이지 못했던 것은 육지전에서 그들이 곤경에 빠졌기 때문이다. 물론 명나라 군대의 지원은 가장 큰 힘이었다. 그러나 조선육군에는 장수가 없었을까?
임진왜란 7년 동안 이순신 장군이 바다에서 23전 23승을 거뒀다면 육지에서, 특히 영남지역에서 60여전 60여승을 거둔 불패의 영웅 정기룡 장군이 있었다. 그럼에도 어째서 정기룡이라는 이름은 낯설까. 불패의 영웅 정기룡은 무슨 이유로 역사의 무덤에 갇힌 것일까.
소설가 박상하의 '나를 성웅이라 부르라 1, 2'(일송북)는 416년 동안 묻혀있던 역사의 무덤을 열어 불패의 영웅 정기룡의 혼령을 깨우고 있다. 박상하의 의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이순신과 원균이 1등 공신에 추품됐다. 육군 무장 가운데 1등 공신은 권율 장군 한 사람 뿐이었다. 권율은 임진왜란 7년 동안 행주산성에 거둔 단 1승밖에 없다. 그러나 정기룡 장군은 왜란 발발 당시 31살의 초급 장교(훈련원 봉사 종8품, 이순신은 47살의 종3품 전라 좌도 수사)로 60여승을 거뒀다. 전과를 인정받아 7년 전쟁기간 동안 고속승진을 거듭 했다. 전쟁 이듬해엔 상주 목사(정3품), 36살에는 종2품 경상 좌도 병사(병마절도사)에 이른다. 그럼에도 막상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어째서 공신대열에서 사라졌을까?"
소설가 박상하는 장군이 '정치적으로 타살'됐을 것으로 본다. 젊은 정기룡이 혁혁한 전과를 바탕으로 고속승진을 하자 견제세력이 많았다는 것이다. 임금 선조와 조정이 살아있는 영웅의 등장을 두려워했다는 가설도 힘을 얻는다. 당시 1등 공신으로 추품됐던 이순신과 원균은 이미 전사한 인물이다. 생존자로 1등 공신에 추품된 권율은 당시 육순을 넘긴 원로였고 실세였던 이항복(병조판서)의 장인이었다. 작가는 권율 장군을 '전형적인 정치 무인'으로 보고 있다. 이런 상황이니 60전 60승의 젊은 전쟁 영웅(정기룡 장군은 당시 38세)이 주변부로 밀려나 역사의 무덤에 갇힌 것은 어쩌면 필연이었는지도 모른다.
"왕조실록을 보면 전쟁이 끝난 후 정기룡을 놓고 공신에 포함시켰다가, 어떤 설명도 없이 107명에 달하는 공신 속에서조차 배제시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정기룡은 영문 모를 옥살이를 하고, 경상 좌도 보다 낮은 밀양 부사로 밀려난다. 다른 전공자와 달리 중앙 관직을 끝내 제수 받지 못한 채 외곽으로만 떠돈 것도 '영웅의 탄생을 두려워 한' 당시 조정의 정치적 견제로 볼 수 있다."
사실 임진왜란을 전후해 조선왕조는 허약하기 그지없었다. 조선왕조가 임진왜란 당시 의병의 전과를 낮춰 평가한 것도, 정기룡 장군을 견제했던 것도, 심지어 이순신 장군이 자살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가 떠도는 것도 조선이 그만큼 허약한 상태였음을 방증한다. 스스로 지켜낼 힘이 없었던 선조와 조정은 오직 명나라 군대의 공로만 인정함으로써 백성의 불만이나 기세, 의병 참전자들의 요구를 억누르려고 한 면이 있다. 오랜 전쟁으로 국토는 황폐되고 국정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상태였다. 살아있는 전쟁영웅을 탄생시킬 경우 자칫 왕권마저 도전 받을 수도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은 80여 군데에서 정기룡을 언급하고 있지만 임진왜란사에서는 이름 정도만 언급하고 가볍게 넘어가고 있는 점도 이를 방증한다.
이 작품은 작가 박상하가 '묻혀버린 역사의 진실을 밝히겠다'는 소명을 갖고 쓴 소설이다. 그렇다면 소설이 아니라 사실이라는 말일까?
"100% 진실은 없다. 정기룡을 사랑하는 밀화, 그의 곁에서 책사 역할을 하는 서정우 등 몇몇을 뺀 나머지는 모두 사실이다. 조선왕조실록을 근간으로 했다. 소설의 근간이 된 자료 '매헌실기(梅軒實記)'는 실재한다. 이는 정기룡 장군에 관한 거의 유일한 기록물이다."
작가는 친한 후배로부터 정기룡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도 해도 '또 무슨 임진왜란 소설인가' 라며 탐탁지 않게 여겼다고 한다. 그러나 자료집 '매헌실기'를 읽으면서 분노를 느꼈다고 했다. 정치적 이유로 역사가 묻혔다는 의구심, 나라를 구한 영웅이 당대 인물의 견제에 의해 사라졌다는 의혹을 떨칠 수 없었다. 또 인간 정기룡이 보여준 의지와 열정, 어떤 고난도 이겨낼 수 있다는 확신은 난세가 아닌 평화의 시절에도, 400여년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유효한 가치라고 확신한다고 했다.
박상하는 그러나 "매헌실기는 뒷날 상주 목사로 부임한 인물이 사람들의 기억을 토대로 작성한 것인 만큼 단단하지 못한 대목도 눈에 띈다. 그래서 소설에서는 애매한 부분을 빼거나, 넣을 땐 반드시 종횡으로 다른 사료들을 참조해 일치하는 부분만 작품으로 옮겼다"고 밝힌다. 이 소설이 대부분 역사적 사실에 바탕으로 두고 있다는 말이다.
소설 '나를 성웅이라 부르라'는 정기룡의 청년시절과 31세로 임진왜란을 맞아 7년 전쟁을 치르는 동안 보여준 활약상, 당시 조선군과 일본군의 전술, 무기체제, 전쟁 구도 등을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전개한다.
작가는 앞으로도 역사에 관한 소설, 역사에 관한 책을 쓸 것이라고 했다.
"역사는 낡은 퇴물이 아니라 미래로 향하는 통로라는 생각을 요즘 더 많이 하게 된다. 앞으로 우리가 맞닥뜨릴 문제에 대한 답을 역사 속에서 찾는 작업을 계속하고 싶다."
그는 다음 작품에서 조선시대 주요 인물들이 이른바 '치욕'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인문학적으로 살펴볼 것이라고 했다. 오래 전부터 구상해왔고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이라고 했다.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박상하는…
1954년생. 건국대학교 교육대학원 국어교육과 졸업. 1995년 허균문학상. 장편소설 '새는 섬에 가서 죽는다' '명성황후를 찾아서1, 2' '은어' '배오개상인 1, 2, 3' '진주성 전쟁기' 등이 있다. 지은 책으로 '우리문화 답사 여행' '우리 옛 성을 찾아서' '한국인의 기질' '이병철과의 대화' '경성상계' 등이 있다.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홍준표, 정계은퇴 후 탈당까지…"정치 안한다, 내 역할 없어"
세 번째 대권 도전마저…홍준표 정계 은퇴 선언, 향후 행보는?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매일문예광장] (詩) 그가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 / 박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