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기는 인삼의 고장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풍기가 인삼뿐이랴.
조선시대의 민간 전래 예언서인 정감록에 의하면 소백과 태백의 양백지간에 위치한 풍기는 "십승지지(十勝之地) 중 으뜸"이라고 했다. 십승지지는 천재지변과 병란(兵亂)이 일어나도 안심하고 살 수 있다는 10곳의 피난처를 일컫는 말로 그곳 중 첫번째로 풍기를 꼽았다. 덧붙이자면 언제고 누구든 간에 "가히복지로다"라는 소리를 들을 만한 10곳의 승지라고나 할까.
풍기는 북천과 남천이 아우르는 이수지합(二水之合)과 부산대수(負山帶水·소백산을 등지고 물길이 띠를 두름)의 전형적인 길지의 지형을 형성하고 있다. 실제 풍기의 주변 지형은 소백산의 세 봉우리인 비로봉, 연화봉, 도솔봉이 서로 돕듯이 풍기를 두르고 있고, 두 산줄기 사이에서 물줄기(북천은 지금의 금계천, 남천은 지금의 남원천)가 시작해 시가지 앞에서 합류하고 있었다. 조선의 지리학자인 이중환도 택리지에서 "반도의 취락 가운데 풍기만한 복지도 드물고, 풍기에 겨룰 만한 땅도 희박하다"고 적고 있다.
풍기의 풍수지리와 관련해 얽힌 이야기도 재미있다. 박석홍 영주시 학예연구원의 설명은 이렇다. 옛날 풍기 사람들은 두 물머리(남원과 금계)가 만나는 곳과 물이 흘러나가는 수구(水口)머리가 처져 있어 이를 '옥에 티'라고 해 인위적으로나마 감추려고 했다는 것이다. 옥에 티를 비보(裨補·허하고 약한 곳을 도와 채운다)라고 했고, 그 비보숲을 '솔경지숲'이라고 칭했다. 지금의 풍기 용천리 뒷산에서 앞을 내다보면 수구가 열려 있다. 그래서 옛 풍기인들은 그곳을 감추고자 소나무를 심어 엄폐했고, 세월이 흘러 학들이 날아들어 집을 짓게 되어 솔숲 지역의 동네가 운학동이요, 구름밭이라는 지명도 생겼다는 것이다.
또 일제 강점기 때 풍기사람들은 풍기를 '작은 서울' '작은 평안도'라고 했다고 한다. 풍기라는 곳이 마치 서울처럼 팔도 사람들이 골고루 모여 사는 고장이란 뜻이고, 그 중에서도 평안도 사람이 가장 많다고 해서 생긴 말이라는 것이다. 조선시대 우리 민족의 경우 한 고장에 뿌리 내려 사는 습성을 가진 겨레로, 큰 도시를 제외하곤 유동인구가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풍기는 큰 도시가 아닌데도 팔도 사람이 모여들었고, 특히 타 지방민들 중 평안도와 황해도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이주해 왔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정감록에 이른바 풍기가 십승지지의 첫째로 꼽힌 길지여서라는 것. 실제 풍기가 한때 황해도 개성에서 온 개성 상인들이 풍기의 경제를 쥐락펴락했다는 이야기도 정감록과 무관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이종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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