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역사 속의 인물] 히틀러가 악용했던 바그너

독일의 작곡가 바그너가 1883년 2월 13일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최후의 오페라인 '파르지팔'을 4년만에 완성한 지 1년 뒤다. 파르지팔은 한때 그의 절친했던 친구 니체로부터 "십자가 앞에 고꾸라졌다"는 비판을 받은 작품이다. 기독교적 순결과 이상에 집착해 독일인들의 영혼을 내세 중심으로 몰아간다는 의미였다. 장엄한 무대를 통해 사람들을 세뇌시킨다는 니체의 비판은 히틀러에 의해 현실이 됐다. 히틀러는 바그너의 예술을 자신의 정치 권력 수립과 유지에 적극 활용했으며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의 전위음악으로 만들었다.

젊은 시절 바그너는 베토벤의 음악과 셰익스피어의 비극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음악가 초기 여러 도시를 떠돌던 그는 결혼 후 파리에서 한동안 거주했다. 이때 리스트를 비롯한 많은 예술가들과 접촉하며 음악적 바탕을 다졌다. 1843년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을 드레스덴에서 초연한 후로 1849년까지 드레스덴 궁정 악장으로 활동하며 '탄호이저'와 '로엔그린' 등 낭만적 오페라들을 작곡했다.

10여년간 망명생활을 한 뒤 1861년에야 정치적 추방에서 풀려난 그는 국왕 루트비히 2세의 눈에 들면서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났다. 1876년에 작은 마을 바이로이트에 오페라극장의 문을 열고 '반지'시리즈를 초연했다.

김재경 사회1부 차장 kj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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