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정치권의 관심은 4·29 재보궐 선거에 쏠려 있다. 어른들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 그러나 초등학생들도 작지만 소중한 자신들만의 선거를 치렀다. 해마다 1·2학기 초에 열리는 전교어린이회장단, 학급 회장단 등 학교 임원 선출을 위한 선거들이다. 대부분 초등학교들은 이번 주까지 이번 1학기 선거를 마무리했다. 기성세대 선거 못지 않게 열기를 보이는 초등학교 회장 선거, 아이들이 민주주의를 체험하는 현장을 들여다봤다.
◆어른들 선거 부럽지 않은 교실
지난 5일 수성구 한 초등학교 교실. 쉬는 시간이라 아이들 소리가 시끌벅적한 가운데 몇몇 학생들이 각자 손에 피켓을 들고 서 있었다. 형형색색으로 꾸민 피켓에는 후보의 사진과 기호, 각종 공약 등이 담겨 있었다. 이들은 다음날 치러질 전교어린이회장단 선거를 위한 막판 유세에 나선 중이었다.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의 기호와 구호를 외치며 한표를 부탁하는 모습이 어느 기성 정치인 못지 않았다.
몇해 전부터 초교 회장 선거는 '열풍' 수준이다. 출마를 결심한 학생들은 개학 전부터 준비에 나선다. 백화점이나 대형소매점 문화센터에서 개설한 '초등학교 반장 선거 대비 특강'을 듣는다. 말 잘하는 훈련을 하기 위해서다. 선거 운동도 매우 조직적이다. 학원이나 아파트 단지별로 특정 후보를 후원하는 아이들도 있다. 선거 캠프에 뛰어든 친구들은 참모로서 함께 연설문이나 선거 홍보물을 만들기도 한다. '환심 사기용 선물'이 등장하기도 한다. 초콜릿이나 과자, 인터넷 게임 머니 등을 주면서 표를 부탁하는 경우다. 얼마 전에는 마술쇼 등 이벤트를 마련해 지지 세력을 확보하려 하기도 했다. 이러한 과열 선거 양상은 각 학교에서 마련한 '선거 매뉴얼'로 일정 부분 잦아들었다.
초교 회장 선거 열풍은 2학기 때가 더욱 세다. 발표회나 운동회 등 각종 행사가 많아 임원들의 역할이 크기 때문이다. 청림초교 손인영 교사는 "1학기 전교 회장 입후보 기간 동안 등록자가 없어 애를 먹기도 했다. 2학기에는 '기대 심리'로 아이들도 적극적으로 나선다. 학부모도 2학기 회장 선거 때에는 도움을 많이 주려 애쓴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수성구 한 초등학교 신모 교장은 "전교회장 후보가 없어 권유를 통해 1명이 겨우 입후보해 무투표로 당선됐다"고 했다. 이로 인해 입후보 학생이 유세를 하면서 멋쩍은 분위기가 연출되기도 했다는 전언이다. 1학기는 아이에게 손이 많이 가는 시기라서 학생들 입후보가 적다는 해석도 있다.
◆민주주의·지도력 학습에도 제격
초교 회장 선거의 효과는 무엇보다 민주주의 과정을 자연스럽게 경험한다는 점이다. 신모 교장은 "초교 선거는 입후보자가 많이 나와 서로 격려하며 경쟁하는 과정에서 민주주의를 배우는 체험학습이 된다"고 정의를 내렸다. 학정초교 손흥호 교사는 "스스로 입후보하고 번호를 추첨받고 유세를 하는 과정에서 아이들이 '민주주의'를 직접 체험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학생 스스로 성장할 수 있다는 매력도 크다. 딸(중1)이 지난해 황금초교 전교회장을 지낸 김두선(38)씨는 "딸아이가 전교회장을 한 뒤 자신감이 더 많이 생겼다. 모든 일에 책임감을 갖고 성실하게 임하는 등 정신적으로도 많이 성숙해졌다"고 했다. 현재 전교 부회장을 맡고 있는 아들(초교 5년)은 5시간 동안 연설문 작성에 매달린 뒤 "책을 읽지 않아 어려웠던 것 같다. 앞으로 책을 많이 읽어야겠다"고 말해 부수적인 '소득'을 올리기도 했다.
리더십을 키우는 것도 하나의 장점이다. 작게는 학급, 크게는 전교 대표자로서 통솔력을 키울 수 있다. 선거기간 동안 운동원들을 이끌고 유권자인 학생들을 상대로 설득해 지지를 끌어내는 과정 또한 이런 학습 과정을 돕는다. 일부 학생들은 아예 선거 전부터 이에 대한 대비에 나서기도 한다. 백화점이나 대형마트, 스피치학원 등에서 운영하는 특강을 통해서 남을 설득하고 말 잘하는 방법을 배운다. 지난 겨울방학 동안 '학급 어린이회장 대비반' 특강을 연 수성동아백화점 문화센터 관계자는 "학교 임원을 노리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발표력 향상 수업을 했다. 강의가 끝난 후 목소리가 작던 애들도 커진 느낌을 받았다"고 전했다. 강의를 맡은 웅변 지도자 노모씨는 "발표력 훈련을 통해 아이들은 자신감을 얻는다. 학생들은 이를 통해 얻은 자신감을 기반으로 리더십을 배우게 된다"고 설명했다. 노씨에 따르면 이렇게 형성된 자신감·리더십을 지닌 학생들은 이후로도 학급 대표를 맡는 경우가 많다. 노씨는 "대입이나 취업 면접에서도 큰 도움이 되기에 학부모들의 관심이 더 많아졌다"는 점도 덧붙였다.
◆치맛바람 vs 자유방임주의
교육 현장의 '치맛바람'은 학교 임원 선거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부모가 적극적으로 나서는 경우도 많다. 김모(36)씨는 지난해 딸(초교 4년)의 출마를 권유했다. "딸이 2학년 때 같은 반인 이웃집 아이가 반장을 한 것에 은근히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부모들은 같은 반 또는 학교 학생들의 부모들에게도 지지를 호소한다. 초교 6학년 아들이 있는 이모(41)씨는 지난해 아이가 학급회장 선거에 재출마할 때 남편과 함께 며칠 저녁을 선거 전략 짜느라 고심한 일이 있다. 1학기 때 선거에 출마했다가 실패한 아들을 위해서였다. 이씨는 아들의 선거를 위해 평소 알고 지내는 같은 반 아이들의 엄마들에게 지지 요청 전화를 돌리기도 했다.
욕심이 앞서는 경우 '돈 선거'가 될 가능성도 크다. 학생들은 학원에 다니고 맞벌이 부모는 시간 내기가 힘들어 홍보물이나 연설문 작성을 전문가에게 맡기기도 한다. POP글씨를 제작하는 김정순씨는 "학기 초마다 주문이 밀려든다"고 했다. 이번 학기 초에도 일주일간 주문이 넘쳐 하루에 수십장을 제작해야 했다. 피켓 하나의 가격은 1만~1만5천원 정도. 한번 주문할 때 기본은 6장, 많게는 10장 이상도 요청하기 때문에 비용이 10만원, 20만원은 훌쩍 넘어선다. 한편당 수만~10여만원 하는 연설문 대필도 전문가에게 맡기거나 인터넷을 통해 주문하기도 한다.
반면 속 편한 부모들도 있다. '아이들 스스로 하게 놔두어야 한다'며 약간 손을 보탤 뿐이다. 김두선씨는 큰딸과 아들의 선거에 나서지 않았다. 평소 반장일에 관심이 많던 아이들이 출마를 결심하자 '열심히 하라'며 다독일 뿐이었다. 김씨는 "피켓 만들 때 종이를 오려주고 연설문 작성할 때 평을 하는 정도만 해주었다"고 했다. '책 잘 읽는 아이가 영어도 잘한다'란 책을 지은 윤찬희(40)씨도 지난해 딸(중)이 전교회장 선거에 나가겠다고 하자 "스스로 알아서 잘할 자신이 있으면 나가라"고 했다.
전교조 대구지부 김병하 사무처장은 "아이들 선거가 어른들 선거처럼 '폼나게' 하려다 보면 돈이 많이 드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정말 열심히 하고 싶은 학생들이 정작 나서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며 우려의 시각을 나타냈다.
조문호기자 news119@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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