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 산천이 울었다. 사람들의 얼굴에 골이 졌다. 흐느끼고 통곡하고 땅바닥을 쳤다. 눈물의 번식력, 감염력이 동시다발적이었다. 내가 본 가장 집단적이고 하염없는 눈물의 행진이었다. 신록의 오월도 어쩔 수 없는 항복이었다. 무채색의 눈물로 뿌옇기만 했다. 몇 며칠 눈물에 속수무책이었다.
어머니를 잃었을 때도 나는 울지 않았다. 너무 오래 아팠고, 너무 오래 가까이 없었고, 너무 오래 정을 떼려 했기 때문이었을까. 내가 너무 어렸기 때문이었을까. 상여를 따라 산등성이를 넘어가던 아버지의 통곡을 그저 멀거니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 아버지를 잃었을 때도 나는 울지 않았다. 종적을 알 수 없었던 눈물은 오랜 뒤에 찾아왔다. 내가 당신들의 삶을 이해할 무렵이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많은 눈물을 쏟았던 적이 있었다. 1998년 IMF로 민생이 만신창이가 되었을 때였다. 권정생 소설 '한티재 하늘'을 읽으며 하염없이 울었다. 그 많은 주인공들의 말할 수 없는 삶의 고통을 공감하며 짐승 소리를 내었다. 서푼어치 내 고통을 더 아픈 그들이 위로해 준 것이다.
눈물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나는 그다지 눈물이 많은 편은 아니다. 애이불비(哀而不悲), 아파도 슬픔을 절제할 줄 아는 것을 미덕으로 여겨서다. 땅바닥을 치는 것보다는 이를 악물고 눈물만 뚝뚝 흘리는 모습에 더 공감했다.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하고 다녔다.
어인 일인가. 이번 눈물바다는 지그시 눈을 감고 눈시울을 적시는 모습에도, 짐승처럼 울부짖는 모습에도 전폭 공감이었으니, 무슨 일인가. 나 또한 때로는 눈시울 붉히고, 때로는 짐승소리를 내었으니.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게다가 평소 현실 정치를 못마땅하게만 여기던 나 아니었던가. 정치의 정점에 서 있던 한 인물의 죽음 앞에 깊이 애도한 것은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함민복 시인은 '눈물은 왜 짠가?'라고 탄식했다. 상식에서 눈물은 단순히 짠맛일지 몰라도 그 근원은 여러 가지일 것이다. 기뻐서, 슬퍼서, 아파서, 같잖아서, 분해서, 막막해서, 기가 막혀서, 억울해서, 통쾌해서, 안타까워서 흐르는 것이다. 나는 이 많은 형용사 앞에 '무엇이'를 다 생각해 보았다. 이번에 흘린 눈물은 이 모든 감정들이 어우러져 낳은 강력한 짠맛이 아니었을까.
눈물의 감염력, 이 속수무책의 사태를 당하고도 태연한 척하는 데도 있고, 우리들의 따뜻한 눈물을 기다리는 데도 곳곳에 있다. 자연은 신록으로 통합을 하는데 인간사는 그렇지 못하다. 여름에 스러지는 풀도 있고, 겨울에 푸른 나무도 있다는 뜻일까. 갈라선다는 것은 하나였다는 뜻이다. 이번 눈물은 아름다운 하나로 가는 밑거름으로 쓰이기를 믿는다. 삼가 울보, 바보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명복을 빈다. 안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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