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어귀에 계절의 전령사 역할을 하는 화원이 하나 있다. 분초를 다투면서 바쁘게 생각없이 살다가도 '느림의 미학'을 떠올리며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힘'이라고 자신을 위로할 때마다 드나드는 꽃집이다.
그런 날 그 화원을 나설 때는 어김없이 충동적으로 구매한 꽃다발이 한아름 내 가슴에 안겨져 있다. 그날도 스쳐가는 바람이 아름다워 발길을 멈추고 계절에 맞게 단장된 화분을 구경하는데 여사장님은 인기척을 내도 대꾸도 없이 전화통화만 하고 있다. 갈 때마다 항상 밝은 얼굴로 반기시는지라 그 인사가 받고 싶어 통화가 끝나길 기다리며 서성대고 있는데 화분들 사이로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학원 전단지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고 보니 통화 내용도 학원상담을 짐작하게 하는 용어들이 섞여져 나온다. 전화를 끊은 여사장님은 꽃을 팔 때의 상냥함은 간 곳 없고 임전무퇴의 여전사처럼 공격적이고 살기등등하다. "이번 중간고사에 성적이 너무 떨어져 학원을 바꿔야 되는데…, A학원은 선생님들이 꼼꼼하지 못하고 B학원은 진도가 느리고…, 우리 희수가 2학년이 되면서부터는 공부보다 일본 만화에 빠져 미술학원에 보내 달라는데 어림없어요!" 꽃집 사장님에게는 서울대를 목표로 하는 자랑스럽고 야무진 수재 따님이 있었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딸에 관한 일이면 엄마'아빠'오빠가 가족회의를 열 만큼 그 딸은 온 가족의 기대와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다.
최근에 "복수당하는 부모, 존경받는 부모"라는 섬뜩한 제목의 책 한 권을 읽었다. '뇌에서 찾은 자녀 교육법의 비밀'이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은 저자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집필하였다고 하는데 결론은 짐작하는 대로 자녀의 동기 부여, 적성을 고려해 아이들이 긍정적인 자아관을 갖고 평생 자신감과 성취감을 갖도록 양육하라는 예측 가능한 진부한 결론이었다.
여기서 내게 떨림을 준 내용은 '복수'라는 섬뜩한 표제로 이 '복수'가 우리 일상에서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이다. 부모나 자녀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 서로가 피해자가 되고 가해자가 되는 것이다. 실제로 자녀들의 가장 큰 가해자는 부모라는 통계가 있다. 이 책은 자녀가 어릴 때는 전권을 휘두르며 적절한 의사 소통 없이 부모가 일방적으로 치밀어 오르는 화나 욕망을 표출하고 키우다가 자녀에게 생기는 후유증은 부모의 막연한 예상을 뛰어넘어 '복수'까지 당할 수 있다는 역설적인 협박을 하고 있었다. 단언하건대 아이 교육은 부모의 열정이나 희생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내가 인생에서 거둔 성공은 어머니에게서 받은 도덕적'지적'육체적 교육의 덕분이다"라고 설파한 것처럼 '공부적' 능력이 아니라 '지적' 능력을 함양시키고 '출세적'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키워야 하고 하루에 10분 만이라도 운동시키는 '육체적'인 교육의 열정이 가미될 때 우리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복수당하지 않는다.
만발하던 꽃이 시들어 가고 있는 환영이 아우라처럼 그 꽃집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교육이란 화를 내거나 자신감을 잃지 않은 채 거의 모든 말을 들어 줄 수 있는 능력이다"라는 프로스트의 말을 교육에 소신이 있는 그 사장님께 하고 싶었으나 용기가 없어 씁쓰름하게 발길을 돌렸다. 또한 나지막하게 영특한 희수가 다니고 싶어하는 만화 그리는 미술 학원에 등록하게 되길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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