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송재학의 시와 함께] 「무릉 풍경」/ 권세홍

비 그치자 무릉 들판에

회나무 한 그루

웅숭깊게 서 있다 싶더니

검은 새떼 묵주처럼 쏟아져 나와

저녁 속으로 박혀 버린다.

갑자기 한 줌 그림자로 바뀌어

회나무는 영영 어둡게 떠날 기색이다.

무너질 듯 산비탈 오두막엔 오랫동안

이 고장 노을을 다스려온 노인 한 분

이제 막 회나무 그림자에 궐련 불을 당긴다.

이런 날 밤엔 무심한 남정네들 꿈에도

가근방에서 색을 가장 잘 쓰는

노을이 찾아들 것이다.

안동 인근의 무릉에서 권세홍이 읽어낸 것은 늙고 어두운 회나무의 불편한 그림자이다. 비장한 세계관이 가장 놀라운 대위법의 상상력을 빌려 탄생했다. 늙은 회나무와 노인이 있고, 회나무와 검은 새떼의 대비가 있고, 노을과 궐련 불빛의 응시가 있고, 그리고 색과 노을의 겹침이 있다. 앞의 어두운 세계는 뒤쪽 색과 노을에 이르러 융합되고 포용되었으며 노인은 무심한 남정네로 순환되었다. 회나무와 새떼의 비극은 둘다 같이 어두워진다는데 있다. 다시 회나무는 산비탈 오두막의 노인으로 치환되어 담배를 피운다. 그 담뱃불은 다시 노을이라는 붉은색과 오버랩되면서 비로소 노인은 자연의 일부분으로 편안하게 노을을 응시한다. 두툼한 목판화의 묘사법을 빌렸다. "무심한 남정네들 꿈에도 / 가근방에서 색을 가장 잘 쓰는 / 노을이 찾아들 것"이라는 행에 이르러 갈등은 생의 순환 구조 속에 삭여 들어간다. 갈등이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생과 자연의 수레바퀴 속에 자연스럽게 섞이는 것이다. 순환적 시간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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