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후손 잇는 것이 개인적 바람" 마지막 황손, 이석 황실문화재단 총재

"이명박 대통령과 독대해 대한민국 황실 자손이 왜 9번이나 자살하려 했는지 들려주고 싶습니다."

이석(68) 황실문화재단 총재의 할아버지는 고종, 큰아버지는 순종, 아버지는 의친왕, 삼촌은 영친왕이다.

조선왕실의 자손, 이석 총재의 삶은 애석하고 애통했다. 왜 그리 애통하고 한탄스럽게 살아야 했는지.

창경초등학교 때만 해도 궁녀 3명이 따라다녔고, 학교 운동회 때도 '왕자님이 경망스럽게 뛰면 안된다'고 해 교장 선생님이 대신 뛰었다. 학교에선 왕자님이 다닌다고 자랑거리였던 인물이다.

하지만 해방이 된 뒤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슬프도록 기구한 삶이 시작됐다. 9번의 자살시도, 10년간 미국에서의 밑바닥 인생, 베트남 전쟁의 상흔, 밴드가수 생활(희트곡 '비둘기집'이 그의 노래다), 전국 사찰로의 방황, 찜질방 생활 등 불과 5년 전까지의 그의 삶의 큰 줄기다. 죽을 운명이었으면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1972년 도봉산 한 바위에 올라가 모든 걸 정리하고 몸을 던졌는데 눈을 뜨니 하늘이 보이고 살아있었다. 소나무에 걸려 생명에는 아무 지장없이 떨어졌던 것. 약을 먹고 죽으려 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누군가에게 발견돼 병원에서 치료받고 또 살아야 했다. 1999년에도 비장한 최후를 맞으려 했다. 자신의 차를 몰고 경복궁을 들이받고 삶을 마감하려 유서를 써놓았는데 이 유서가 발각돼 세상에 알려지면서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

그랬다. 그는 이 나라의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한탄했다. 또 끊임없이 삶과 죽음의 문턱을 오가게 한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그렇지만 하늘의 뜻인지 삶의 줄을 놓지 않았던 탓에 오늘날 새 희망을 꿈꾸는 생활을 하고 있다.

5년 전부터는 새 삶을 시작했다. '자살'이란 생각도 사라졌다. 전주시의 도움으로 전통한옥체험마을에 거주할 곳도 생겼고, 이 힘으로 3년 전 조선왕조 왕실을 재건하는 황실문화재단 총재로 거듭난 것이다.

그는 자신에 기막힌 삶에 대해 "왕인 조상들의 죄(정적 참수, 피비린내나는 권력투쟁 등)가 많지 않겠느냐. 그 모든 업을 후손의 삶을 통해 지도록 한 것 같다"며 "이제 다 받아들이고 제 삶을 통해 조금이나마 조선왕조의 업을 풀고 갈 수 있다면 다행"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18일 서울 여의도 63빌딩 인근 커피숍에서 그를 만나 구구절절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1시간 30분가량 듣고 나니 '이석'이란 주인공의 '슬픈 황손'이라는 한편의 드라마가 완성됐다.

◆왕손이지만 딴따라의 삶

"노래가 좋았고 내 노래를 듣고 울고 웃는 모습을 보는 것이 제일 즐거웠어요."

이석 총재는 근엄한 왕실가 자손이지만 조선시대가 아닌 근·현대를 살면서 노래를 벗삼아 살아왔다. 당시만 해도 가수, 배우 등은 '딴따라'라고 해 감히 연예인이 된다는 것을 꿈꾸지 못했다.

그는 외교관을 꿈꿨지만, 운명처럼 다른 길을 갔다. 부산에서 피란생활을 끝내고 서울로 올라와 경동중·고교를 거쳐 한국외국어대 서반어학과에 입학했다. 졸업 후 그를 기다리고 있는 삶은 음악 DJ이자 가수로서의 삶이었다.

그가 가수로서의 삶을 살아가려 하자 왕실 후손들은 안타까워하고 만류도 했다. 하지만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비록 가수였지만 1979년까지 조계사 앞 사동궁과 안국동 별궁, 그리고 7궁(왕비는 아니었지만 그 후손이 왕에 올랐던 귀빈·희빈·숙빈을 모신 곳)에 머물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왕실 후손들에게 매달 일정 정도의 생활비(합계 800여만원)를 지원해줬다. 그럭저럭 살 만했고 히트곡도 나왔다. "♬비둘기처럼 다정한 사람들이라면 장미꽃 넝쿨 우거진 그런 집을 지어요♬" 이 '비둘기집'을 비롯해 '외로운 조약돌' '사랑은 밀물처럼' '두마음' 등 많은 곡을 내놓았다.

1970년대 미군 위문공연 전담밴드 '팔도강산'의 보컬도 멋들어지게 해냈다. 너무 많은 월급(3만원)을 요구했다 나가게 된 가수 최희준의 뒤를 이어 2년가량 팝송, 가요 등을 불렀고, 이후 가수 조영남에게 바통이 넘어갔다. 대구 팔공산쇼, 동양방송 백화가요쇼 등 전국을 누비면서 무대 사회도 봤다.

하지만 이도 잠시. 격동의 세월은 그를 미국으로 내쫓았다. 미국생활 만 10년 뒤 일본공주였던 숙모가 세상을 떠나 장례식에 참석한 뒤 한국으로 귀국했다. 이후 한국에서 MBC 가요초대석 MC자리를 꿰차면서 인생이 새롭게 피어나나 했더니 1년도 안 돼 대형 교통사고를 겪었다. 그는 경부고속도로 신갈 부근에서 트럭과 충돌사고로 12일간 의식을 잃고 있다 겨우 깨어났다.

이 사고 이후 그는 삶과 죽음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양산 통도사를 찾아가 수도승 아닌 수행승이 돼 삶을 성찰했다. 육주사, 수국사, 월정사 등 전국 사찰 곳곳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기도 했다. 잘 곳이 없을 때는 찜질방에서 숙식했다.

◆악착같이 살았던 미국생활 10년

"시민권을 얻기 위해 결혼했고, 먹고살기 위한 각종 허드렛일을 했습니다. 마트에서 일하다 강도만 13번 만났습니다."

군사정권에선 피곤한 존재였던 왕실 자손들. 이들은 궁에서 쫓겨나 이리저리 흩어져야 했다. 이석 총재는 혼자 미국에서 버려진 삶을 살아야 했다. 딱 10년이었다. 하지만 그는 악착같이 살았고 결혼도 했다. 이때만큼은 단 한순간도 죽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궁에서 쫓겨나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미국 뉴욕, LA, 시애틀, 라스베이거스, 샌프란시스코 등 여러 곳을 돌며 잔디깎는 일, 수영장 청소, 권총을 찬 채 동네 야간순찰 등 하루 15시간 동안 힘들다는 생각을 잊을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그는 그 시절을 돌아보며 "미국에선 무조건 살려고 열심히 일했는데, 이게 지금 건강의 밑거름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미국 생활 중 그는 불가피한 결혼을 하게 됐다. 시민권을 얻기 위해 1만5천달러를 주기로 한 정략결혼이었다. 그는 아내가 경영하는 마트에서 지배인처럼 일했다. 하지만 월급은 정략결혼의 대가가 됐다. 마트에서 일하며 6년 동안 강도만 13번 만나 협심증까지 얻었다.

"마지막 강도가 한국 청년이었어요. 장총을 들고와 처음에 영어를 하더니 나중에는 한국말로 욕을 하더라고요. 참 허탈했어요."

미국 생활 10년은 삶을 위한 몸부림이었고, 그만큼 앞뒤 돌아볼 여가 없이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황실문화재단 총재로 거듭난 삶

고난의 삶을 전전하던 그의 삶은 5년 전 전주시의회 한 의원의 5분 발언으로 반전의 계기를 맞았다. 왕실 후손에 대한 지원 필요성을 역설했고, 결국 지방자치단체에서 이를 수용했다.

이후 그는 전주 한옥체험마을에 둥지를 틀 수 있었고, 생활비도 지원받고, 파출부까지 붙여줘 가사일 도움도 받을 수 있게 됐다.

생활이 안정되자 조선황실 복원에도 나설 수 있었다. 대구와 경산, 부산, 원주, 김제에도 지부를 둘 정도로 제법 조직을 갖췄다. 그는 총재가 됐고 전국을 돌며 조선황실의 안타까운 현실과 복원의 필요성, 국가적 지원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는 강의를 한다. 물론 국가 정체성에 대한 얘기도 빼놓지 않는다. 가수가 본업이었던 만큼 요즘은 가끔 가요무대 등에서 노래도 부른다.

개인적 바람도 있다. 마음이 아름다운 여성과 사랑하며 후손을 낳고 싶은 열망이 아직도 있다. 노욕이라고 욕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부친 의친왕은 62세에 이석을, 72세에 막내를 얻었다고 귀띔했다.

자신의 인생 스토리를 털어놓은 이 총재는 63빌딩 앞에서 기자와 헤어질 때 "이제 정말 살 것 같다. 삶과 죽음 모두 초탈해 제가 할 일을 찾고 희망적으로 살 수 있다는 게 너무 좋다"고 환하게 웃었다. 그의 머리 위로 63빌딩은 한없이 높았고, 하늘을 더없이 청정했다.

권성훈기자 cdrom@msnet.co.kr

사진·프리랜서 장기훈 zkhaniel@hotmail.com

※이석은?=1941년 서울 태생. 창경초교, 경동중·고교, 한국외국어대 서반어학과 졸업. 월남전 파병 상의군인. 1979~1989년 미국 거주. 통도사에서 3년간 수행. 팔도강산 밴드 등 가수활동, 가요프로 MC. 현 황실문화재단 총재. 히트곡 '비둘기집' '외로운 조약돌'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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