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 사회는 여러 분야에서 소통 부족에 의한 극한 대립으로 국론이 분열되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서로가 한발씩 물러나 다양한 의견을 들으며 시비를 정확하게 가릴 수 있는 '兼聽則明'(겸청즉명)의 자세가 절실하다.
당(唐) 태종의 시대(서기 627∼649)를 '貞觀之治'(정관의 치)라고 한다. 비단길을 개척한 한무제, 청의 전성기를 연 강희제의 집권기와 함께 중국사의 황금시대로 꼽히는 시기이다. 당 태종이 '정관의 치'를 열 수 있었던 것은 결단력이 뛰어난 杜如晦(두여회), 기획력이 빼어난 房玄齡(방현령), 강직한 대부 魏徵(위징) 등과 같은 賢臣(현신)의 보필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위징은 역사적인 교훈을 예로 들면서, 군주의 편파적인 판단이 얼마나 잘못된 결과를 초래하는지 설명하곤 했다. 항상 직언으로 태종의 잘못을 스스로 고치도록 해 황금시대를 여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대범성과 포용력이 뛰어난 당 태종은 무슨 일을 할 때마다 늘 위징으로부터 꾸지람을 당하지 않을까 조심했다.
역사가들은 위징을 춘추전국시대 제 환공을 보필한 관중, 삼국시대 촉의 유비와 유선을 보필한 제갈공명의 맥을 잇는 명재상으로 평가한다. 목숨을 건 그의 직언에 대해 당 태종은 때로는 기분이 나쁘고 때로는 죽이고 싶었지만 꾹 참고 그의 말을 들음으로써 역사상 최고의 성군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충언이라도 자꾸 들으면 짜증이 나는 법. 성군인 당 태종도 어느날 울화가 치밀대로 치밀었다. 하루는 황제가 조회를 마치고 들어와 황후에게 말하기를 "그 촌놈을 죽여버려야지…" 하면서 단칼에 목을 칠 것 같은 위세를 보였다.
그러자 황후가 그 내막을 알고는 조용히 물러갔다가 조복을 갈아입고 들어와 황제에게 넙죽 절을 했다. 의아해 하는 황제에게 황후는 이렇게 말했다. "임금이 밝으면 신하가 곧다(君明臣直)고 했습니다. 위징이 곧은 것을 보니 폐하의 밝음이 드러나는지라 이를 경하드립니다." 황제는 바로 황후의 깊은 뜻을 알아차리고는 화를 풀고 위징의 직언을 계속 되새겼다고 한다.
위징의 간언은 준엄했으며, 때로는 태종을 정면으로 비난하기도 했다. 태종은 이에 대해 화를 내는 일도 간혹 있었으나 200여 차례에 걸친 그의 간언을 대부분 받아들였다. 그러나 태종(598~649)보다 18세 위인 위징은 태종보다 먼저 죽었다.
태종은 위징이 죽자 자기를 비춰보던 거울이 깨졌다고 애통해 했으나 한편으로는 직언을 하는 신하가 없어지자 편해졌다. 그래서 마지막 꿈이었던 고구려 침략(645년)에 나섰다. 그러나 연개소문과 안시성 성주 양만춘이 이끄는 고구려군에 대패해 겨우 몇 백기만 이끌고 요하를 건너 간신히 중국 땅으로 도망쳐왔다.
당태종의 유명한 탄식이 여기서 나온다. "만약 위징이 살아 있었다면 이 전쟁을 막았을텐데..." 결국 당 태종의 뛰어난 통치는 대고구려 전쟁의 실패로 빛을 잃게 된다. 지도자가 어진 참모의 말을 잘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역사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태종의 충신 위징은 그래서 "군주는 배이며 백성은 물이니,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고 뒤엎기도 한다"며 백성을 두렵게 여기라고 늘 왕에게 간언했다. 21세기형의 신형배를 운행하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 지도자들이 새겨야 할 대목이다. 혜명동양학연구원장 www.donghak8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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