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살아가는 이야기] 외갓집 I

※생활의 발견, 작은 감동 등 살아가면서 겪은 경험이나 모임, 행사, 자랑할 일, 주위의 아름다운 이야기, 그리고 사랑을 고백할 일이 있으시면 사진과 함께 보내주십시오.

글을 보내주신 분 중 한 분을 뽑아 패션 아울렛 올브랜 10만원 상품권을 보내드립니다. 원고 분량은 제한 없습니다.

보내실 곳=매일신문 문화체육부 살아가는 이야기 담당자 앞, 또는 weekend@msnet.co.kr

지난주 당첨자=김진수(대구 서구 비산동)

다음 주 글감은 '외갓집Ⅱ'입니다.

많은 사연 부탁드립니다.

♥잊지 못할 그리움의 대상

살다보면 잊지 못할 그리움의 대상이 있는 것 같다. 나에게 외갓집이 그렇다. 어릴 적 외갓집에 가는 길은 참으로 험난하기 그지 없었다. 같은 대구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차가 없었던 우리 집은 잘 오지도 않는 버스를 1시간 넘게 기다리기 다반사였고,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드릴 군것질거리를 사들고 버스 오기만을 한없이 기다리기를 시작으로 논공까지 1시간, 논공에서 내려 옥포까지 30분을 걸어 내려가다 보면 외갓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기운이 다 빠져 버렸다. 그래도 외손녀 외손자가 왔다고 허리가 꾸부정한 외할머니는 손수 대문 앞까지 마중 나오셨고, 그 뒤로 환하게 웃어주시는 외할아버지 모습에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크게 외치던 우리 남매였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아궁이 밥과 갓 잡아 삶은 돼지고기 반찬을 많이 해주셨는데 도시 입맛에 너무나 길들어진 우리는 소시지 반찬만 찾다 밥을 안 먹겠다고 투정부리다 결국 엄마한테 혼나 울면 외할머니가 다정히 달래주시던 기억이 난다.

지저분한 재래식 화장실에 가기 싫다고 투정부린 기억, 외할아버지가 직접 소 여물을 주시던 모습, 앞마당 큰 감나무에 홍시 따먹던 기억, 자기 전 내 머리맡에 깨끗이 씻은 요강 챙겨주시는 외할머니 모습이 지금도 아련하다. 몇년 전 큰 외삼촌이 돌아가시고 작은 외삼촌마저 이혼하셔서 늘 명절 때마다 시끌벅적 비좁았던 시골집이 어느 순간 너무나 커져 버렸다.

큰 외삼촌에 대한 그리움과 먼저 떠나 보낸 아들에 대한 원망, 작은 외삼촌에 대한 걱정으로 너무나 늙어 버린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모습만 생각하면 왈칵 눈물부터 난다.

너무나 커버린 우리들에 비해 너무나 작아진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모습에 무심하기만 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늘 넘치는 사랑 주셨는데 이제는 내가 나눠드릴 차례다.

어느덧 커버린 남동생이 입대 후 6개월 만에 첫 휴가를 나온다. 남동생이 휴가 나오면 같이 외할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알사탕과 외할머니가 좋아하시는 단팥빵을 사들고 다녀올 생각이다. 아름답고 아련한 나의 외갓집으로^^

박선영(대구 북구 고성3가)

♥초라한 외갓집-친구들에게 아니라고 거짓말

아주 어릴 적 초등학교 때인지 중학교 때인지 기억마저 가물가물하다. 살아오면서 언제부터인지 외갓집이란 말만 나오면 참으로 바보스러웠던 예전 기억에 가슴이 아려온다.

요즘 아이들은 소풍가는 것도 버스를 타고 가지만 우리 땐 봄 소풍, 가을 소풍을 걸어서 갔다.

산이나 들로 물 맑고 경치 좋고 그늘이 있는 곳이라면 최고였다. 아마도 가을 소풍인 것 같았는데, 짝꿍이랑 손잡고 노래 부르며 먼 길을 걸어서 아주 깊은 골짜기 동네로 갔다. 하천이 넓고 깨끗한 곳이었다.

점심을 먹고 친구들이랑 이런저런 구경을 하는데, 친구 하나가 너희 외할머님 댁이 저 집이 아니냐고 했다. 얼핏 외할머님이 보였다. 그런데도 난 아니라고 우겼다. 집이 너무 초라하고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았다. 노래에나 나올 법한 오막살이집 그 자체였다. 부엌 한 칸에 방 한 칸, 정말로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외할머님이 밖으로 나오시는 것 같아 난 얼른 숨어 버렸다. 그 때는 왜 그랬을까?

어린 마음에 집도 초라하고 연세도 많아 친구들 앞에 떳떳이 말하기엔 창피한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두 분만큼 인자하시고 정이 많으신 분이 또 어디 계실까 싶다. 외할아버님께서는 긴 흰 수염에 기다란 곰방대를 항상 물고 계셨고 할머님은 언제나 웃음이 많으신 분이셨다. 철이 늦게 든 탓에 때늦은 후회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외할아버님 외할머님 정말 죄송합니다. 철없는 외손녀가 마음속 깊이 용서를 빕니다. 그때 싸가지고 간 김밥이라도 한 줄 드리고 왔으면 하는 가슴 아픈 후회를 하면서요.

손해숙(의성군 금성면 산운2리)

♥ 가마솥 한가득 술빵 해놓으신 외숙모

초등학교 5학년 때, 기다리던 겨울 방학이 되자마자 서둘러 시골 외갓집으로 갔습니다. 지금이야 교통이 좋아져서 승용차로 30분 거리지만 당시만 해도 빨간 버스(시외버스)를 타고 2시간 걸려 가고 동네 입구에 내려서 30분을 걸어가야 외갓집이 나옵니다.

미리 연락하고 가서 그런지 외숙모가 술빵을 가마솥에 한가득 해놓고 계셨습니다. 사촌 형제들 하고 가마솥 한 개 분량의 술빵을 해치우고 산으로 들로 뛰어 다니다 보니 겨울의 짧은 해는 서산으로 저물었습니다.

외갓집에 돌아오니 외숙모는 저녁밥을 차려 주셨습니다. 사촌들과 함께 여덟명이 우르르 몰려 들어가 앉으니 방 안은 시끌벅적 했습니다. 갑자기 아랫배에서 신호가 살살 와 화장실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키가 작은 나로서는 엄청난 크기의 '재래식 화장실'의 판자 위에 걸터앉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바지를 내리고 한쪽 다리 걸치고 다음 다리를 걸치고 앉는 순간 미끄러지면서 그대로 똥통에 빠져 버렸습니다. 순간 하늘이 새까매지면서 그 뒤로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나중에 들어보니 모두들 앉아서 저녁을 먹는데 갑자기 외삼촌이 저녁 드시다 말고 번개같이 뛰어 나가시더랍니다. 앉아서 밥 먹던 사람이 열명이 넘었는데 외삼촌 혼자 내가 화장실에 빠지는 소리를 들었던 것입니다. 아무튼 외삼촌이 어떻게 목덜미를 잡아서 올렸고 외할머니 손에 이끌려 근처 개울에 가서 씻었습니다. 12월의 한겨울 날씨에 엉엉 울면서 똥물 덮어 쓴 채 걸어가는 모습, 지금 상상해보니 웃음이 한 가득입니다.

비누도 가지고 갔었는데 쑥색인데 돌인지 비누인지 거품도 안 나고 옷하고 머리는 얼어있고 난 그날 추워 죽는 줄 알았습니다. 고생고생하며 씻었습니다.

냄새가 열흘이 넘게 나더라고요. 내가 느끼는데 다른 사람이야 오죽할려고요. 아무도 근처에 오지를 않았어요. 물어보고 화장실에 가야 했는데 나중에 보니 아이들 용은 따로 있었습니다. 내가 들어간 곳은 어른용 화장실이었습니다.

외갓집만 생각하면 아직도 내 유년기의 추억 속으로 되돌아 갈 수 있어 행복합니다. 즐거운 주말에 똥 이야기를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너그러이 용서하시길 바랍니다. ㅠㅠ

전병태(대구 서구 평리동)

♥깎아 주시던 참외-그래서 외갓집인줄 알고

어린 시절 내 고향은 뿌연 황토 먼지가 휘날리는 영천-포항 간 신작로에서 깊은 산과 큰 저수지를 끼고 산골길을 따라 십리를 가야 하는 전형적인 산골 농촌마을이었다. 그렇다 보니 농촌의 수입이라야 벼, 보리 재배가 대부분이며, 요즘처럼 흔한 참외, 수박 등은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리고 차량이라고는 산판(나무를 베어내는 산의 일터)의 나무를 실어 나르는 트럭 외에는 구경하기가 매우 어려워 나는 신작로를 달리는 자동차 구경을 위해 어머니를 졸라 자주 외갓집에 가곤 하였다.

당시 외갓집은 고향 마을 길목의 신작로에서 바라보이는 조그마한 마을에 있어 마루에 서서 신작로를 바라보면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은 포플러 가로수 사이로 가끔 지나가는 자동차가 마냥 신기하고 즐거워 '빠이빠이' '빠이빠이'하며 손 흔들어 인사했던 기억이 난다. 외갓집을 비롯한 마을 어르신께서 '외'(경상도지방 '참외'의 방언) 농사를 지어 바지게에 담아 비지땀을 흘리며 고향 마을 등지로 팔러 다니시던 모습이며, 또한 외갓집에 가면 하나뿐인 외손자라고 나를 얼마나 귀여워 하셨는지 '외'를 깎아주시면서 "어서 마이 실컷 무래이" 하시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던 인정 많고 인자하신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모습도 생생하게 떠오른다.그때 나는 '외'가 있어서 '외갓집'인줄 알았다. 어리석은 어린 아이여서 그랬을까?

요즘도 가끔 고향에 가다보면 들판 저 멀리 외갓집이 눈에 들어오건만 내 어릴 적 반갑게 얼싸 안아주시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물론 외숙부님 내외분, 외종 형님께서도 이미 하늘 나라로 가시고 이제 형수님 혼자 농사를 지으시며 덩그렇게 남은 외갓집을 지키고 계신다. 이순을 바라보는 나는 어머님의 친정인 외갓집만 생각해도 금세 동심의 세계로 되돌아간다.

최주원(대구 동구 불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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