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2009 낙동·백두를 가다] (44) 인재향, 구미

영남 인물 절반 차지…길재선생 이래 절의의 고장으로

구미 선산 땅이 광활하다. 선산은 조선의 인재향(人材鄕)이었다. 선산은 성리학의 기틀을 다졌고, 또한 성리학의 연수처이기도 했다. 15세기 선산은 조선에서 가장 많은 인재를 배출한 고을로 그 이름을 떨쳤고, 동시에 충의와 절개의 고장으로도 명성을 쌓았다.
구미 선산 땅이 광활하다. 선산은 조선의 인재향(人材鄕)이었다. 선산은 성리학의 기틀을 다졌고, 또한 성리학의 연수처이기도 했다. 15세기 선산은 조선에서 가장 많은 인재를 배출한 고을로 그 이름을 떨쳤고, 동시에 충의와 절개의 고장으로도 명성을 쌓았다.
금오서원은 구미지역 최초의 서원으로, 선산 학맥의 가장 큰 어른인 야은 길재를 배향한 곳이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도 제외된 금오서원은 지금도 구미 학풍의 정신을 잇고 있다.
금오서원은 구미지역 최초의 서원으로, 선산 학맥의 가장 큰 어른인 야은 길재를 배향한 곳이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도 제외된 금오서원은 지금도 구미 학풍의 정신을 잇고 있다.
모원당은 조선 중기 영남 사림의 대유인 여헌 장현광을 모신 곳이다. 여헌은 벼슬보다는 학문 수양과 후학 양성에 매진했고, 우국충절의 표상으로도 숭상받았다.
모원당은 조선 중기 영남 사림의 대유인 여헌 장현광을 모신 곳이다. 여헌은 벼슬보다는 학문 수양과 후학 양성에 매진했고, 우국충절의 표상으로도 숭상받았다.

반만년 우리 역사에서 영남은 인재의 본향이다. 일행도 낙동강을 따라 경북의 각 지방을 찾으면서 느낀 공통 분모도 그러했다.

경북의 여러 고을 중 안동과 예천, 상주 사람들은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반은 안동, 예천, 상주에 있다"고들 한다. 얼마나 인재가 넘쳤기에 서로가 '인재향(人材鄕)'이라고 자부하겠는가.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은 지금의 구미인 선산을 이렇게 적었다. "남쪽에 있는 선산은 산천이 상주보다 더욱 깨끗하고 밝다. 전해오는 말에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반은 일선(선산의 별호)에 있다'고 한다. 까닭에 예로부터 문학하는 선비가 많았다. 임진년에 명나라 군사가 이곳을 지나갈 때 명나라 술사가 외국(조선)에 인재가 많은 것을 꺼려 군사를 시켜 고을 뒤 산맥을 끊고 숯불을 피워 뜸질을 하였다. 또 큰 쇠못을 박아 땅의 정기를 눌렀다."

구미가 조선의 인재향임을 알려주고 있다. 구미와 안동, 예천, 상주 출신의 선현들은 영남을 대표했고, 나아가 조선에 큰 기여를 하였기에 오늘에까지 '인재향'이라는 수식어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인재향 구미 속으로 들어갔다.

지금의 구미로 대표되는 선산 땅에 인재가 얼마나 많았는지 갈증부터 났다. 구미문화원이 발간한 인물 자료를 열람했다. 산술적으로 선산이 영남 인재의 절반을 차지했겠냐만은 조선의 선산이 대표적인 인물의 본향임은 자명했다.

조선의 소과(과거) 합격자 중 선산 출신은 329명이었다. 이는 경상도 전체에서 안동(783명), 상주(470명)에 이은 3위권이었고, 전국 330여 고을 가운데에서도 최상위권인 17위에 그 이름을 올렸다.

이중환의 선산 인재론처럼 조선 영남사림의 대표 인물이자 대유학자인 점필재 김종직이 선산부사 재임 시 쓴 한 축시에서도 "일선엔 예로부터 선비가 많아서 영남의 반을 차지한다하거니와 삼년마다 수재를 논할 적엔 뛰어난 재사가 마을을 빛냈고 조정에서 높은 재능 발휘한 사람도 한 두 사람만이 아니었는데…"라고 읊었다.

또한 15세기의 선산은 조선 최고의 인재향으로 그 이름을 더욱 높인다. 선산 출신 과거 문과 합격자 수가 64명이었는데, 이는 당시 선산과 고을 세가 비슷했던 대구는 5명 내외의 급제자를 배출했다는 기록에서도 선산이 돋보인다.

인재향 선산은 조선 선조 임금도 인정한 것 같다. 임진왜란 후 선조는 전후복구사업의 일환으로 전대 충신들의 능묘를 정비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에 승정원은 정몽주, 길재,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조광조, 이언적, 서경덕, 이황, 조식 등 조선 성리학의 계통에 위치한 14명을 확정했다. 14명의 조선 인물 중 경상도 출신은 8명이었고, 이들 중 선산과 직·간접적으로 인연을 맺은 인물은 길재, 김종직, 김굉필 등 3명이었다. '영남 인재의 절반이 선산에 있다'는 표현이 결코 과장은 아닌 것은 분명했다.

인재향의 또 다른 공통점은 바로 서원과 향교다.

'학교'가 있어야 후학이 양성되지 않는가. 안동과 예천, 상주 땅에 수많은 서원과 향교가 있는 것처럼 구미도 그랬다. 금오서원, 월암서원, 동락서원, 낙봉서원 등 15개나 된다. 금오서원은 야은 길재 선생을 배향한 서원으로 구미지역 최초의 서원이다. 금오서원은 조선 후기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도 '살아남은 '서원이다.

또 선산향교와 해평향교는 구미의 가장 대표적인 향교다. 조선은 '1읍 1교' 원칙을 고수했다. 하지만 당시 선산부에는 선산향교와 당시 해평현의 '해평향교'라는 두 개의 향교를 보유한 예외적인 지역으로 인정받았다. 이들 향교는 수많은 인재를 배출, 서원과 함께 '인재향'의 양대 산실인 것이다. 조선의 1읍 1교의 예외는 선산부에 인재가 많고, 향학열이 뜨거웠음을 입증하는 예가 아닐까.

구미는 고려 말과 조선을 거치면서 유교로 대변되는 성리학의 본향이다. 또한 조선 성리학의 기초를 다져 영남 사림(士林)을 탄생시킨 성리학의 연수처였다. 구미를 안동과 함께 '대한민국 정신문화의 수도' 반열에 올려도 결코 부족함이 없는 이유가 아니겠는가.

여말에 절개를 지킨 충신이자 정몽주의 성리학을 계승한 야은 길재, 야은의 제자이자 점필재 김종직의 부친인 강호 김숙자, 영남 사림의 영수인 김종직은 물론 사육신 하위지, 생육신 이맹전 등 명현과 조선 중기의 영남 대유(大儒) 여헌 장현광 등 걸출한 인재를 배출했다. 근래에는 대한민국 국가 경제의 기틀을 다진 박정희 전 대통령도 구미가 낸 인물이다. 지금의 김관용 경상북도지사도 구미인이다.

구미의 토성 가문인 해평 길씨의 길재 선생은 구미 인재향의 큰 어른이다.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과 함께 '여말 3은' 중 한 명이다. 길재는 여말 격동기 정계보다는 줄곧 고향 선산에서 성리학의 윤리를 몸소 실천했다. 그의 학자로서의 명망은 수많은 영남 선비들이 선산행을 택하게 했다. 길재의 동생 역시 승려로 출가했다 제자로 돌아올 만큼 길재 주변엔 영남 인재들이 모여든 것이다. 충신 길재는 선산 땅을 '절의의 고장'으로도 이름나게 했다. 세종과 단종 때 효자·의부 선발에서 선산은 단연 전국 으뜸이었다.

김숙자는 구미의 대표적인 가문인 일선 김씨이다. 김종직의 아버지인 김숙자는 길재로부터 큰 가르침을 받았다. 문과 급제 후 고령과 개령(김천 땅)의 현감 등으로 재직하면서 길재의 학풍을 전파했고, 평생을 길재와 함께 선산을 조선 성리학의 초석을 다진 곳으로 자리 잡게 한 대유학자이다.

한국 성리학사에서 큰 획을 그은 점필재 김종직 역시 선산인이다. 조선 역사의 대사건인 '조의제문'을 지은 장본인이다. 외가인 경남 밀양에서 태어난 김종직은 아버지 김숙자가 바로 스승이었다. 나아가 길재가 큰 스승으로 그의 학풍을 이었다. 김종직은 당대 학문으로 뛰어난 어세겸으로부터 "나에게 말고삐를 잡고 따라 다녀라 하여도 마땅히 달게 받겠다"고 칭찬을 들을 정도였다. 성종이 경연(經筵)을 열어 학문하는 선비를 찾으니 그 첫째가 바로 김종직이었다. 김종직은 당시 정계를 장악한 훈구파 인사들로부터도 아낌없는 찬사를 들었고, 당시 훈구파와 대립되는 사림파의 대표인물(영수)로 자리 잡게 된다. 김종직은 사후인 연산군 4년 때 세조 때 지은 조의제문이 빌미가 돼 '부관참시'를 당하고, 문하생 33인이 참혹한 화(무오사화)를 입게 된다. 또한 이 사화로 김종직이 저술한 대다수의 글이 불에 타 세상과 단절됐다. 지금은 10여권의 책만 전할 뿐이다. 만약 점필재가 무오사화를 겪지 않았다면? 그의 학문적 업적은 지금까지 남아 점필재의 학문세계가 만천하에 알려지지 않았겠는가.

길재와 김숙자, 김종직의 학문라인은 15세기에 들어 선산을 전국 최고의 인재향 반열에 올린다. 하위지, 박서생(의성 비안), 이맹전(성주), 오식(울산), 유면(인동), 전가식(담양), 서극(김천), 방영(밀양) 등은 당시 수많은 조선 선비들 중 선산 인재향의 '대표선수'였다.

선산의 성리학은 영남도 비좁았다. 16세기 선산 임씨의 임억령·백령 형제, 선산 류씨의 류희춘·성춘 형제는 호남 지방의 성리학 발전에 큰 기여를 한 인물이다.

성리학의 본향 선산은 선비의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인 충의와 절개를 상징하는 고을이었다. 길재로부터 비롯된 충의와 절개는 선산 땅에 사육신인 단계 하위지와 생육신인 경은 이맹전이라는 인물을 낳게 한다. 단계는 태종 때 선산에서 태어났다. 그의 천재성은 세종 때 장원급제라는 가문의 영광을 안긴다. 하지만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인 단종을 내쫓자(계유정난) 단종 복위를 계획했고, 그 계획이 탄로 나자 성삼문, 박팽년 등과 함께 참사를 당했다.

경은은 계유정난 후 선산에 내려와 은둔했다. 곡기를 끊다시피하며 단종이 귀양간 강원도 영월을 향해 매일 향배를 하고, 한양 땅과 결코 마주하지 않는 불사이군의 선비상을 실천했다. 경은은 당시 영남 사림들로부터 영남 절의의 상징적 존재로 일컬어졌다. 김종직이 선산부사로 임명돼 고향 땅에 내려왔을 때 가장 먼저 찾은 이가 바로 이맹전이다.

선산은 조선 중기에 오면서 여헌 장현광이라는 당대 최고의 영남 대유를 배출한다. 구미 인의동에는 모원당이라는 고택이 있다. 여헌사상의 산실이다. 인근의 원래 살던 집이 임진왜란 때 소실되자 친척과 제자들이 새로 지어준 집이다. 모원당은 여헌의 청렴한 생활을 보여주듯 소박하고 간결한 '일자형' 집이었다. 구미 인동이 본관인 여헌은 퇴계 이황의 제자인 한강 정구 선생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퇴계학파의 대표 인물. 또한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오직 학문과 제자 양성에만 몰두해 조선 중기 이후 '여헌학파'라는 영남의 큰 학맥을 형성했다. 여헌이 지금까지 영남 대유로 존경받는 것은 율곡 이이의 이기론 등 다른 학파의 학문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생각을 가졌기 때문이다. 학문의 세계에 경계가 없음을 실천한 것이리라. 여헌은 평생을 청렴하게 살았고, 병자호란 때는 의병을 일으키고, 군량미를 모아 전장터에 보내 사림으로부터 우국충절의 표상으로도 숭상받았다.

지금의 구미는 우리나라 내륙 최대의 산업도시이다. 한국 경제의 큰 버팀목이자 수출 전전기지다. 구미는 지금도 옛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유구한 역사와 그 역사 속에서 꽃핀 수많은 인재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구미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산업도시 구미에서 인재향 구미도 반드시 찾아야 할 것이다.

글 이종규기자 구미·정창구기자

사진 정운철기자

자문단 권삼문 구미시 학예연구사 구미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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