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동해안 밤바다는 오징어잡이 불야성

오징어만큼 빛을 좋아하는 어종이 또 있을까.

오징어는 빛을 좋아하는 주광성이라는 본능을 가지고 있어 밝은 빛이 있는 곳으로 모여든다고 한다. 낮 동안엔 깊은 바다에 머물러 있다 밤이 되면 수심 20여m의 얕은 곳으로 올라오는 속성을 지녔다.

이 때문에 어부들은 오징어의 주광성을 이용, 집어등(集魚燈)으로 대낮같이 밝은 불을 켜놓고 오징어를 유인한다. 불빛에 현혹된 오징어 떼가 어선 주위로 몰려들면 낚시가 촘촘히 달려 있는 형광물질의 플라스틱 막대를 물속으로 드리우면 오징어는 불빛에 반사되는 이 막대를 먹이로 착각해 몸체 양 끝의 긴 두 다리로 끌어안다가 몸이 낚시에 걸리고 만다.

어부들은 오징어잡이에 사용하는 집어등을 어화(漁火)라 부른다. 요즘 울진과 영덕 등 동해안의 밤바다에는 '고기잡이의 꽃'인 이 어화가 만개했다. 한마디로 동해안의 밤바다는 불바다 그 자체다. 휘황찬란한 불빛은 '신공업단지가 새로 생겨났나'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이색적인 풍광을 연출하고 있다.

울진 후포'죽변항 등 오징어 천국

오징어가 돌아왔다.

매년 이맘때면 울진 후포항과 죽변항 등 동해안의 크고 작은 항'포구에는 오징어로 발 디딜 틈조차 없다.

그 중에서도 '오징어 촌'으로 불리는 조그마한 어촌 마을인 기성면 망양리 주민들은 오징어 건조 작업으로 눈코 뜰 새가 없다.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오징어로 시작해 오징어로 하루 일과를 마무리한다. 행정 구역상 망양1리와 2리로 나눠져 있지만 전체 주민이라곤 143가구 260여명에 불과하다.

이 마을은 관동팔경 중 1경으로 예부터 시인묵객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던 망양정(望洋亭)이 있던 마을로 유명하다. 현재 망양정은 조선 철종 때인 1860년에 근남면 산포리 바닷가로 이건된 것이지만 송강 정철이 호방하게 노래하고 겸재 정선이 사실감 있게 그린 진경산수화의 그 바다와 정자는 이곳 망양리를 배경으로 했다.

옛 망양정 터는 마을 한가운데 7번 국도변 절벽 위에 있는데 '바다를 바라보는 정자'라는 이름만큼이나 동해의 망망대해가 한눈에 들어온다. 비록 정자는 사라지고 없지만 옛 영화가 그리운 듯 해풍과 함께 긴 세월을 살아온 늙은 소나무 다섯 그루와 유허비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망양리 주민들도 오징어 손질 바빠

동해안 대부분의 어촌마을이 반농반어에 종사한다지만 마을 뒤 험준한 산 등으로 인해 유독 농토가 적은 망양리엔 주민 90% 이상이 직간접적으로 오징어 관련 일을 한다.

마을 원로들과 어촌계에선 "처음엔 몇 사람이서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낱마리의 오징어를 파는 게 고작이었지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손님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예상 밖의 수익이 생겨나자 너도나도 오징어 건조와 판매에 나서게 됐다"고 설명했다.

현재 판매장을 만들어 전문으로 파는 가게만도 60여 가구나 된다. 마을 공동으로 포장지와 박스를 주문 제작할 만큼 규모도 커졌다. 찾아오는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한 소매는 물론 대구 등지의 대형 상회에 납품하는 도매상도 적지 않다. 여기에다 카드기까지 설치해 놓고 주문 택배에다 전자 상거래를 하는 집도 생겨날 정도다. 오징어 판매가 가계의 주 수입원이 된 지 오래다.

해안가 덕장은 물론 주택가 옥상이나 공터에서 오징어를 말리는 풍경은 이 마을만의 독특한 멋이 되면서 망양리 마을 앞 도로는 오징어 명물 거리로 인식돼 오고 있다.

주문 택배에 전자 상거래까지

한때 대학을 우골탑(牛骨塔)이라 불렀던 시절이 있었다. 자녀가 대학을 가면 일 년에 소 한 마리씩은 팔아야 대학을 다닐 수 있었기에 소뼈로 쌓아 올려진 상아탑에 대한 비유로 생겨난 말이다. 하지만 이 마을에선 '나이 든 어머니가 힘든 일을 하며 학비를 댄다' 해서 모골탑(母骨塔)이라거나 '오징어를 팔아 학비를 댄다'해서 오골탑이라 부른다.

만나는 주민들마다 "오징어 덕분에 지금껏 밥 먹고 자식들을 학교 보내고 키워왔다"고 했다.

울진산 오징어는 전국에서도 알아준다. 그 중에서도 망양리 오징어는 한 값을 더 쳐 준다.

좋은 오징어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잡은 오징어를 얼마만큼 신선한 상태에서 빨리 말리느냐가 관건.

망양리에서 건조하는 오징어는 대부분 마을 앞바다에 그물을 쳐 놓은 정치망 어장에서 잡은 고기를 바로 싣고 와 할복해 건조한다. 회를 쳐 먹어도 좋을 만큼 싱싱하다. 건조 오징어도 그날 잡아 그날 건조하는 '당일발이 오징어'와 잡은 오징어를 냉동 창고에 꽁꽁 얼려두었다가 꺼내 말리는 '냉동 오징어' 두 종류가 있다. 망양리 오징어는 당일발이 오징어다. 또 건조도 일부 지역에서 성행하는 열이나 불이라는 인위적인 방법 대신 철저하게 자연 햇살과 해풍에 의존한다. 유통기간이 짧더라도 고유한 맛을 유지하기 위해 절대 방부제를 넣지 않는 것도 이곳 오징어의 특징.

"최고 신선도'엄격한 품질관리" 자랑

한 주민은 "한때 장사가 잘 되자 일부 주민들이 돈 욕심에 냉동 오징어를 건조, 울진산 오징어로 원산지를 둔갑시켜 판매한 적이 있었어요. 하지만 4, 5년 전 주민들이 '이래선 다 안 되겠다'라는 문제 의식을 갖고 자발적으로 나서서 정화 운동을 벌였고 지금은 그러한 불법 행위가 완전히 사라졌다"며 어두웠던 과거(?)의 일을 살짝 공개했다.

망양 오징어가 최고라는 이유 중의 하나가 여기에 있다. 엄정한 품질관리를 거쳐 생산된 오징어는 한 축(20마리)당 1만5천원에서 상품은 4만원까지 한다. 물론 말만 잘 하면 얼마간의 에누리도 가능한 현장의 인심은 살아 있다. 이처럼 주민들의 후한 인심과 부드럽고 담백한 맛에 반한 소비자들의 주문이 이어져 매출은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다.

하지만 망양리 주민들에게도 최근 고민거리가 하나 생겨났다.

내년 봄 완공을 목표로 현재 공사 중인 7번국도 4차로 도로가 마을 뒤로 개통되면 자연적으로 통행 차량은 줄어들게 되고 결국 오징어 판매에 막대한 지장이 초래될 게 뻔하기 때문.

그래서 주민들은 울진군이 적극 나서서 대안을 마련해 주길 바라고 있다.

주민들은 "관광객들이 스쳐지나가지 않게 4차로에서 2차로로 연결되는 양 방향 마을 입구에 대형 안내 표지판 설치를 해 주었으면 한다"면서 "신설 4차로 빈 공터에 대형 휴게소나 판매장을 마련, 마을 주민들이 생계 유지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으면 더욱 좋겠다"고 입을 모았다.

마을 중간 지점에 위치한 바위섬과 옛 망양정 터, 그리고 해수욕장과 방파제를 이용한 먹을거리 장터 마련도 요구 사항.

주민들은 망양리가 명실상부한 동해안 최고의 오징어 명물 거리가 될 것이라는 희망가를 부르며 오늘도 오징어 건조작업에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울진'황이주기자 ijhwa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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