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영화속 예술 산책] 스모크/웨인 왕 감독

담배연기, 일순간 사라질 칙칙한 삶의 무게

숀 펜이 주연한 영화 '21그램'은 영혼의 무게를 21그램으로 그리고 있다.

이 세상에는 잴 수 없는 것들이 많다. 삶의 무게도 그렇고, 인정의 무게도 그렇다. 덧없이 느껴지는 일상, 두서없이 흩어지는 하루하루들. 어느새 한 해의 마지막 달을 맞았다.

오늘은 담배 연기처럼 무심하지만, 그래도 삶은 아름답지 않은가라고 묻는 영화 '스모크'(1995년)를 얘기하자.

담배 연기의 무게가 얼마나 될까. 고혹스럽게 내뿜는 그레타 가르보의 담배 연기, 얼굴 가득 흠뻑 뿜어내는 험프리 보가트의 연기, 피우는 듯 마는 듯 빨아내는 샤론 스톤의 연기, 짙은 생활고가 가득 담긴 '마부'(1961년)의 김승호의 연기…. 허공에 흩어지는 같은 담배 연기지만 누가 피우느냐, 언제 피우느냐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 그렇다면 무게도 다를까.

홍콩 출신 미국 감독 웨인 왕이 감독한 '스모크'의 배경은 뉴욕 브룩클린의 한 담뱃가게다. 시시껄렁한 동네 사람들이 모여 잡담을 나누는 사랑방 같은 곳이다. 올 때마다 늘 담배 2갑을 사가는 소설가 폴 벤자민(윌리엄 허트)은 단골 손님이고, 주인 오기(하비 케이텔)도 담배를 물고 산다.

폴은 한때 잘나가는 작가였지만, 사랑하는 아내가 어느 날 노상에서 강도를 만나 죽은 후 그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어느 날 늦은 저녁, 느긋하게 담배를 피우며 얘기를 나누던 폴은 오기가 내놓은 앨범을 보게 된다. 4천장이나 되는 사진이다. 14년 동안 매일 오전 8시에 한 장씩 찍은 사진이다.

담뱃가게 앞 3번가 거리 같은 장소 같은 시간. 청소차가 지나가고, 바쁘게 출근하는 사람들. 그 속에서 폴은 아내의 얼굴도 보게 된다. 그때 아내는 임신중이었다. 사진을 쓰다듬으며 폴은 눈물을 흘린다. 무심하게 내뿜는 담배 연기처럼 무심하게 찍은 4천장의 사진. 그 속에 얼마나 많은 사연들이 담겨 있을까.

영화는 서로 다른 다섯명의 이야기를 서로 얽어낸다. 어릴 적 자신을 버린 아버지를 찾아온 라시드(해롤드 페리누), 음주 운전으로 아내를 죽인 후 평생 죄책감에 쫓겨다니는 라시드의 아버지 사일러스(포레스트 훼테커), 18년 만에 오기를 찾아와 도와달라고 사정하는 애꾸눈의 루비(스톡커드 캐닝). 이들은 폴과 오기를 둘러싸고 실타래처럼 뒤엉켜 엮어간다.

외로운 도시, 오기의 담뱃가게는 서로 미워하고 또 서로를 괴롭히지만 결국 함께 보듬고 가는 사람들의 공간이 된다. 감춰두었던 진실을 말하고, 또 함께 눈물을 흘리는 해원(解寃)의 장소다.

웨인 왕 감독과 함께 '스모크'의 시나리오를 공동 집필한 폴 오스터(1947~ )는 1990년대 미국 문학계를 대표하는 작가 중 한명이다. '언어의 마술사'라는 찬사를 받은 탁월한 이야기꾼이다. 1987년 '뉴욕 삼부작'은 존재론적 문제와 정체성에 관한 질문을 제기해 관심을 모았다. '스모크'는 1992년 출간한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신비주의적이면서 사실적인 그의 소설과는 달리 '스모크'는 폴 오스터의 사적인 면모가 상당 부분 투영되어 있다. 특히 주변 사람들의 고통을 따뜻한 시선으로 관조하며 함께 아파하는 폴 역의 윌리엄 허트의 고독한 모습은 자신과 많이 닮아 있다고 스스로 피력한 바 있다. 폴 벤자민은 그의 첫 소설 '스퀴즈 플레이'에서 쓴 필명이기도 하다.

'스모크'는 외로운 도시에서 살아가는 영혼들의 상처를 아물게 하는 주술사 같은 영화다. 아들은 미워하지만 끝없이 그리워한 아버지를 포옹하고, 마약에 찌든 옛 여인의 딸을 연민하고, 가게 물건을 훔친 좀도둑을 어루만진다.

이 모든 것을 담배와 카메라, 그리고 크리스마스로 연결시킨다. 하긴 이 세 가지는 언제나 찾아가 쉬고 싶은 마음의 고향이기도 하다. 반복되지만 프레임마다 조금씩 다른 4천장의 사진은 담배 연기처럼 한 순간 놓쳤을지도 모를 아름다움을 변주하고, 오기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매년 따뜻한 연말을 그리워하는 이들에게 시선을 조금만 돌리면 아름다운 이야기 천지라는 사실을 깨우쳐 준다.

영화는 오기가 들려준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흑백으로 압축해 보여주는 것으로 끝이 난다. 물건을 훔친 좀도둑의 지갑에서 낡은 사진을 본 오기가 그 낡은 임대 아파트를 찾아가게 되고, 거기서 눈 먼 노파를 만나 오랜만에 집에 온 손자처럼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낸다. 따뜻한 저녁을 먹은 후 오기는 자신도 모르게 그 집에서 35㎜ 카메라를 들고 나오게 되고, 그 이후 그 카메라로 매일 사진을 찍게 되었다는 고해의 이야기다.

이때 흘러나오는 곡이 탐 웨이츠(1949~ )의 '이노센트 휀 유 드림'(Innocent when you dream)이다. '종탑 안엔 박쥐들이 있고, 황무지엔 이슬이 맺히는데, 나를 붙들고 그녀의 사랑을 맹세하던 그 팔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이냐. 지금 내가 훔쳐내는 것들은 옛 추억들….' 지난 과거를 회상하며 꿈꾸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남저음 목청으로 노래한 곡이다. 탐 웨이츠는 담배와 위스키로 절여진 허스키한 목소리의 소유자로 잘 알려져 있다.

탐 웨이츠의 목소리, 담배 연기, 낡은 카메라의 셔터 소리, 그리고 가슴을 데우는 관대함.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그리운 것들이다.

김중기 객원기자 filmto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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