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실에서 만나는 환자 대부분은 아픈 손과 발이 온전한 손과 발의 상태로 기능과 모양이 회복되었을 때 만족스러워한다. 우리 조상들은 머리카락도 신체의 일부라 하여 훼손을 금기시 하였는데 손과 발은 오죽하겠는가. 환자의 이러한 마음을 모르는 바가 아니기에 필자가 치료 중 느끼는 상심과 고통은 환자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환자들의 아픔을 함께해 온 2009년을 마무리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환자가 떠오른다.
"00공사 도중 담벼락이 무너지는 사고로, 작업인부 한 명이 그 자리에서 숨지고 또 다른 한 명은 인근 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 중입니다"
지난 2월 대구 지역 뉴스에 나온 사고 환자인 영재씨를 다음날 병원에서 만날 수 있었다. 뉴스에 나올 만큼 큰 사고로 발을 심하게 다쳐 발목 부위를 절단할지, 발을 살려 치료를 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이 우선 급한 상태였다. 환자'보호자와 상의 끝에 발을 살려보기로 결정하고, 오랜 치료기간이 필요한 것이다. 뼈를 고정하고 피부를 봉합하는 수술을 해서 어느 정도 발 모양을 갖추었지만 조직의 괴사 및 염증이 문제였다. 날마다 수술실을 들락거리며 생리식염수로 씻어내는 치료를 반복했지만 결국 발가락의 괴사는 막지 못해 절단을 했다. 그러나 일부 피부 결손 부위는 피부이식을 해 간신히 발을 살릴 수 있었다.
수술 후 5개월이 지나면서 치료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영재씨의 상태가 많이 좋아져서 퇴원을 한 후 통원치료를 계속해도 좋다는 필자의 생각을 전했다. 다음날 아침 출근길에 병원 로비에서 한층 환해진 영재씨와 마주쳤다. 아마도 일부러 필자를 기다린 듯했다. 영재씨는 산업현장에서 단련된 거친 손으로 꼬깃꼬깃 접은 쪽지 하나를 필자에 건넸다.
'발을 낫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희망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 발로 가을에 낙엽도 밟고, 겨울에 눈이 오면 발자국을 새길 수 있게 됐습니다. 선생님 덕분입니다.'
짧지만 감동적이었다. 동료가 죽는 사고였기에 정신적인 충격이 매우 컸을 텐데 긴 치료 과정에서 희망을 키워왔던 것이다.
그리스'로마신화에 나오는 판도라의 상자 이야기가 떠올랐다. 판도라가 신이 선물로 준 상자를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열어버리자 절망, 고통 등은 모두 날아 가버리고 마지막에 남은 것이 '희망'뿐이었다. 영재씨가 키워온 희망을 더해주는 일을 필자가 한몫했다는 생각에 힘들었지만 보람으로 다가왔다. 가끔씩 회복이 불가능해 보이는 손상된 손과 발이 다시 되살아나 점점 기능을 찾아가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보통 기적이라 비유되는데 필자는 진심이 통했다고 믿는다. 환자의 간절한 소망과 마음이 의사에게 전해지고, 의사의 진지한 노력이 더해져 마침내 기적과도 같은 결과를 낳는 것이리라.
현재 영재씨는 병원에 오지 않고 있다. 하지만 지난 가을 걸려온 전화에서 은행나무 낙엽도 밟았다고 했으니 잘 지낼 것이라 믿는다. 아직 대구에 눈은 내리지 않았지만 올해가 다 가기 전 "하얀 눈 위에 멋진 발자국을 새겨보니 발이 시리네요" 라는 영재씨의 소식이 기다려진다.
이영근053)550-5000 trueyklee@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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