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전자어음 할인기피…흑자 中企도 "부도날 판"

은행 한도 꽉 차고 사채업자마저 거래 꺼려

대구 달성군에서 철강 설비 제조업체 D사를 운영하는 P사장은 이달 직원 8명의 월급을 주지 못했다. 망해가는 회사여서 그런 것이 아니다. 회사는 올해 22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직원 1인당 매출이 3억원에 육박했다. 일감이 너무 많아 문제일 지경이다. 요즘도 수주가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왜 월급을 주지 못했을까?

달서구 한 찻집에서 기자와 만난 P사장은 "정말 분통이 터진다"고 하소연했다. "지난달부터 일정 규모 이상의 업체는 반드시 전자어음을 쓰도록 제도화됐습니다. 저희도 설비 납품 대금 1억7천만원을 전자어음으로 받아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전자어음이 4개월짜리라 현금화를 위해서는 할인을 해야하는데 요즘 전자어음은 할인이 잘 되지 않습니다. 종이 어음은 할인했으나 전자어음은 금융 당국이나 세무 당국에 책을 잡힐 가능성이 있어 사채업자나 거래 업체가 기피합니다."

이러다보니 회사가 자칫 흑자 부도날 지경이다. 은행에 가서 할인하는 방법이 있지만 워낙 많은 전자어음을 받아 어음할인 한도마저 꽉 찼다.

그는 직원들도 체임을 참아내겠다고 했고 회사 인근 식당 아주머니도 밥값 결제를 미루겠다고 했지만 은행에서 빌린 돈의 이자가 밀리는 것이 무섭다. 제때 이자를 못내면 은행은 갖고 있는 담보를 경매 처분, 결국 회사가 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전자어음제를 시행하면서 작은 기업들을 위한 어음 유동화 대책을 세웠는지 묻고 싶습니다. 금융위원회, 국민고충처리위원회에 수차례 전화해 하소연해도 '문제점을 잘 알고 있다'는 대답뿐입니다. 그런데 '대책이 없다'고 합니다. 작은 제조업체들은 다 죽으라는 얘기입니까?"

그는 주변의 많은 중소기업인들이 같은 처지라고 했다. 기자와 대화 중 그를 아는 기업인이 전화를 걸어왔다. 2천700만원짜리 전자어음을 받았는데 할인할 방법을 묻는 전화였다.

"전자어음을 시행하기 전 유예 기간을 둔다든지, 단계적으로 시행한다든지 해서 기업인들의 충격을 줄일 방안을 마련했어야지요. 이대로 가면 자금 수요가 폭증하는 설 전후에 전자어음을 들고 있는 많은 중소기업들이 쓰러질 겁니다."

찻값 계산은 기자가 했다. 평생을 생산현장에서 지냈다는 P사장이 두툼한 손으로 펼쳐든 지갑엔 현금이 없고 신용카드 뿐이었다.

최경철기자 koala@msnet.co.kr

▷전자어음= 지난달 9일부터 자산 100억원 이상 기업이나 외부감사를 받는 기업은 약속어음을 반드시 전자어음을 발행하도록 법제화됐다. 금융당국은 어음분실, 사기, 위·변조 를 방지할 뿐 아니라 기업회계의 투명성을 높여 조세 공평성도 확보할 수 있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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